[집중탐구] 과학기술사회학
[집중탐구] 과학기술사회학
  • 이영희 / 가톨릭대 교수
  • 승인 2002.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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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과학기술사회학(sociology of science and technology)은 그 내부에 매우 다양한 이론적 흐름들을 포괄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학 연구는 초창기에는 과학사회학과 기술사회학으로 분리된 채 전개되다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과학기술사회학으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먼저 과학사회학의 전개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과학사회학은 크게 보면 과학을 하나의 사회제도로 간주하고 과학이라는 제도가 작동되는 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제도의 사회학’과 과학지식의 창출과정을 연구하는 ‘과학지식의 사회학’으로 나눌 수 있다.

과학제도의 사회학은 미국의 기능주의 사회이론가였던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에 의해 1930년대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머튼은 과학을 하나의 합리적인 사회적 제도로, 즉 과학을 합리적인 규범이 지배하는 과학자사회의 합리적 산물로 파악하였다. 머튼은 과학활동이라는 사회적 제도는 과학자들이 신봉하는 일련의 ‘가치규범’에 따라 작동한다고 보았다. 보편주의(universalism), 공유주의(communism), 조직화된 회의주의(organised skepticism), 그리고 불편부당성(disinterestedness)이라는 가치규범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가치규범으로 인해 과학활동은 사회의 여타 부문들의 일상적인(종종 이기적인) 이해관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에 대한 합리적겙눗活岵?지식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후 머튼과 그의 제자들(Harriet Zuckerman, Jonathan Cole, Stephen Cole 등)은 과학의 규범구조에 대한 주장에서 벗어나 과학자 내부의 계층화 현상, 과학자들에 대한 보상체계 및 통제체계, 그리고 과학성장의 사회적 조건 등의 영역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머튼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수행된 기능주의적 과학사회학에서는 사회제도로서의 과학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조건들만을 분석하는 데 연구대상을 국한함으로써, 지식의 내용과 사회적 요인들간의 관계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연구는 수행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 1970년대에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과학지식의 생산과정에 초점을 두면서 새롭게 등장한 과학지식의 사회학(사회적 구성주의)은 머튼의 과학제도의 사회학을 과학지식에 관한 ‘블랙 박스주의’(black boxism)라고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학기술사회학의 현대적 흐름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론과 상대주의 과학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1970년대에 들어와 영국의 에딘버러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과학사회학 연구그룹은 과학지식에 부여되었던 특권적 인식론적 지위, 즉, 과학지식은 여타의 지식과는 달리 사회와는 무관하게 발전한다는 관념을 거부하고 과학지식도 여타의 지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산물임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전통적 실증주의적 과학관과는 달리 자연법칙의 충실한 재현을 보증해 주는 합리성의 보편적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지식의 선택은 과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혹은 개인적 이해관계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고 본다. 즉, 순수하고 사회로부터 자율적인 과학이란 일종의 신화이며, 모든 과학지식은 그 지위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동등한 사회학적 설명이 가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사회학은 흔히 과학지식 사회학의 ‘강한 프로그램’(Strong Programme)이라고도 불린다.

이 새로운 과학사회학의 핵심은 과학지식이 자연계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창출되며 과학지식의 진위에 대한 평가는 그 자체가 사회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새로운 과학지식의 사회학에서는 과학기술이라는 지식체계도 여타의 지식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결국 과학기술지식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인식론적 상대주의(epistemic relativism)를 방법론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참된 지식과 그릇된 지식에 대한 기존의 구분방식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종래의 지식은 하나의 지식 주장(knowledge-claim)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지식 주장이 어떠한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참된 지식으로 간주되게 되었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과학사회학의 과제가 된다.

이처럼 상대주의적 과학관에 근거하여 과학지식의 내용 자체를 사회적 구성의 결과로 보는 새로운 과학지식의 사회학은 ‘강한 프로그램’을 필두로 하여 해리 콜린스(Harry Collins) 에 의한 ‘상대주의의 경험적 프로그램’, 라투어(Bruno Latour)와 울거(Steve Woolgar) 등에 의한 ‘실험실 연구’, 그리고 깔롱(Michel Callon) 등에 의한 ‘행위자 연결망이론’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사회학의 흐름을 통칭하여 사회적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은 1980년대에 들어와 기술사회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통적으로 기술사회학은 기술 그 자체를 그냥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단지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예컨대, 전화나 텔레비전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데 초점을 두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새롭게 등장한 기술사회학은 당시 한창 세를 확장하고 있던 과학사회학의 사회적 구성주의를 받아들여, 기술의 내용이 결정되는 과정은 사회적 요인들이 깊게 개입되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며, 따라서 기술에 수반되는 사회적 영향 역시 특정한 방향성이 미리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된다고 하는 사회적 구성주의 기술사회학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구성주의 기술사회학 내에는 기술적 인공물을 주로 기술자 집단 내의 행위자간 상호작용의 산물로 이해하는 미시사회학적 접근법 뿐만 아니라, 기술형성의 역사적겚망뗌?측면을 중시하는 거시사회학적 접근법도 포함된다. 예컨대 사회적 구성주의에 기반해 있는 어떤 기술사회학 연구들은 제품시장, 경쟁환경 및 여타의 경제적 압력, 국가에 의해 제공되는 지원과 규제, 그리고 자본과 임금노동의 계급관계, 성(gender)관계, 권력관계 등의 보다 거시적인 요인들이 기술의 속도와 방향, 형태, 그리고 기술의 사회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나친 상대주의, 반실재론 경향 극복해야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사회적 구성주의에 기반한 과학기술사회학은 과학기술지식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치중립적이며 객관적이고 보편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사회적 상황, 우연적 요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불확실성과 가변성을 지닌 지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과학기술지식이 주장해온 진리에 대한 독점적 권리 주장을 상대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과학기술지식의 상대화는 현대사회에서 압도적 권위를 부여받고 있는 과학기술 만능주의(과학주의 및 기술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구성주의 과학기술사회학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구성주의 과학기술사회학 내에서 종종 나타나는 지나친 상대주의와 반실재론의 경향, 아울러 실천적 문제의식의 결여와 아카데미즘에의 함몰 등에 대해서는 과학기술사회학계 안팎에서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최근 과학기술사회학은 사회적 구성주의에 제기되는 이러한 비판들을 과학기술사회학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자기성찰의 계기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