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동산] 강의평가의 공개에 대하여
[노벨동산] 강의평가의 공개에 대하여
  • 전경훈 / 전자 교수
  • 승인 2005.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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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패션뿐만 아니라 정부 시책마저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유행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시정수가 상대적으로 큰 학교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는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 보면 대대적인 학과 통폐합을 비롯한 굵직굵직한 유행의 파고들이 쯔나미처럼 대학가를 휩쓸고 지나갔다. 하물며 국내의 모 대학에서는 전자계열의 학과와 기계 계열의 학과를 통합한 사례까지 있었지만 결국 파도가 잦아든 후 대부분의 무리한 학과 통폐합은 제 자리를 다시 찾았다. 포항공대는 때로는 이러한 진동의 근원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때로는 비이성적인 유행의 파도에 굳건히 저항하기도 했다.

근래에 들어 국내 대학가를 흔들고 있는 유행 파동으로 영어 강의와 교수 평가를 들 수 있다. 모든 제도는 그 시행 방법과 시행 시기 그리고 그 제도가 시행되는 조직의 특성에 따라 득이 될 수도, 또는 해가 될 수도 있다. 영어 강의는 어느 새 거부할 수 없는 추세가 되었고 교수 평가 역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 대학에서 교수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외국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교수 평가의 방법에 대해서는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대학들에서는 매 학기 교수들의 강의를 학생들이 평가하여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물론 교수들이 자신의 강의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강의 내용을 더욱 충실하게 할 수 있는 방편은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성을 인식했기에 포항공대는 국내에서 가장 초기에 강의 평가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대학에서의 학생과 교수와의 관계는 미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미국에서의 학생과 교수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계약에 의해 정의된 관계다. 학생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액수의 등록금을 내고 학교와 계약을 한다. 교수는 이러한 계약의 틀 안에서 학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학생들은 당연히 서비스의 질에 대해 평가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절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강의를 제공하는 교수들은 제재를 받게 되고 학생들은 계약에 명시된 최소한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강의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계 설정이 미국에서 기능하는 이유는 미국 사회의 모든 면이 계약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최근 포항공대에서는 그 동안 본인과 학과 주임교수 등에게만 공개되던 강의 평가 결과를 학과내의 다른 교수들에게 공개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다음 단계는 누가 보나 전체 교수 그리고 학생들에게 강의 평가 결과를 공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강의 평가와 그 결과의 공개가 명확한 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과연 우리가 지향하고 싶은 교수와 학생간의 관계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의 교수와 학생은 적어도 아직은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기보다는 부모 자식과의 관계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계 설정이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서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서양 사회에서 공부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교수들이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학생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신경 쓰게 되고 결국 높은 평가점수를 받을 수 있는 강의를 하게 되고 그 평가 결과가 공개되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긴 안목으로 내다볼 때 과연 우리 학생들에게 궁극적으로 이득이 될 것인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상향 평가와 그 결과를 공개하여 망신을 주는 방법이 진정 강의의 질을 높이고 학생들에게 궁극적으로 이익을 돌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강의 평가의 공개가 진정 피할 수 없는 변화의 바람이라면 무작정 따라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도가 미치는 단·장기적인 영향을 다각도에서 고려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한 후 시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평가를 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단지 평가서를 작성해야 학점 조회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진정 후배들에게 더 좋은 강의를 물려주기 위해 강의 평가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교수들은 본인의 강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공평하고 정당한 feedback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강의 평가 제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하지 못하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부작용이 생길 경우 교수 연구 업적 평가 과정에서 발생했던 부작용들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히 복구되지 못할지도 모르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설 때 학생들을 소비자 모니터로서 보다는 사랑스런 자식들로 보이길 원하는 것이 이 시대에는 지나친 욕심일까? 아니면 나도 벌써 나이가 들어 이미 “보수골통”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