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계단] 자전거, 김호길 그리고 4월
[78계단] 자전거, 김호길 그리고 4월
  • 황희성 기자
  • 승인 2004.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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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던 해 봄에야 자전거를 배웠다.
아버지께서는 ‘남자녀석이 자전거 하나 못타서 되겠느냐’며 변속기도 없는 자전거를 구해 오셨고, 나는 무릎하고 손바닥이 다 까져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자전거를 겨우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몰 수 있게 된 것이 4월 중순이 다 되어서였고, 그때부턴 친구들과 동네 여기저기를 자전거 타고 놀러 다니기 바빴다.

4월 30일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수업이 끝난 토요일 오후, 친구와 동네 여기저기를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며 놀던 도중에, 친구녀석이 급하게 꺾인 경사길을 가리키며 ‘여기로 가보자’고 이끌었다.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탈 수 있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초보였던 지라 그런 급경사길에서 속도를 충분히 줄여야 한다는 걸 모르고 과속으로 경사에 들어섰던 나는 세워져 있던 소형차를 피하지 못하고 그만 들이받아버렸다. 그리고 그 중간과정은 기억에 없고 한 4시간 쯤 후에 눈을 떴다는 것이 기억난다.

일어나자마자 들었던 소식은 내가 부딪힌 그 차의 스포일러가 두 동강이 나고 후미등이 박살났다는 것과 그날 오전에 우리 집이랑 가까운 총장 공관에 살고 있던 김호길 총장께서 체육대회 행사 중에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 이었다.

아버지 직장이 직장인지라 ‘제철보국’의 POSCO와 ‘과학입국’의 포항공대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했다.

그 시절 내 머릿속에는 무조건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동경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사나이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포항공대와 POSCO의 설립 스토리는 그 동경과 섞여 나를 더더욱 자극했다.

그런 살아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크게 다친 날 죽다니-나는 거기서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고, 그로부터 9년 후, 그때 느낀 동질감이 현실로 다가왔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포항공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학교 생활을 거치며 김호길 총장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가면서, 그에 대한 막연한 호의로 차있던 내 마음은 그에 대한 애정과 부정(否定)으로 반반쯤 섞였다.

학생들의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거침없이 ‘학교의 주인은 재단이다’라고 답하는 권위적인 그. 학교 설립을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설립이사장에게 당당히 자신의 권한을 주장하는 그. 총장 자리에서 내려온 후에는 신입생들의 물리 수업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박한 그. 어느 쪽을 보고 어느 쪽을 싫어해야 하며 어느 쪽을 좋아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말하기 힘들다.
그는 현재의 포항공대에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지도자 일지도 모른다. 그의 카리스마는 요즘 시각에서 본다면 자칫 독선일지도 모르고, 그의 유학자적 정신 역시 지금의 세태와는 맞지 않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 시대가 변화하고, 구성원들의 의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포스테키안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다. 그가 세운 기반없이 포항공대라는 대학이 이 땅의 연구중심대학의 역할을 제시하는 대학이 될 수 있었을까.

서울에서 400여 km이상 떨어진 지방에서 이만한 역량을 가진 대학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자전거는 뒤를 보면서는 탈 수 없다. 그러나 전에 배웠던 방법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제대로 자전거를 탈 수 없다.
김호길 총장에 집착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만, 그를 기억하고 그에게서 긍정적인 쪽에서든 부정적인 쪽에서든 교훈을 얻어내는 것이 그의 10주기를 맞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