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동산에서] 오늘도 노벨동산은 아름답다
[노벨동산에서] 오늘도 노벨동산은 아름답다
  • 김원중 / 인문교수
  • 승인 200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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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문학의 감상과 이해’의 강의가 끝난 다음 수강 학생 30여명과 함께 노벨동산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2001년 이번 학기로 나는 이 노벨동산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1987년 개교하던 해 여름, 계절강좌에서 ‘문학의 감상과 이해’를 6주간 집중강의한 것이 인연이 되어 14년 동안 포스텍 맨의 한사람으로 노벨동산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다. 내가 포항에서 교직생활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포항공대의 탄생은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박태준 이사장, 김호길 총장 이 두 분이 손을 잡고 세운 포항공대는 출범 당시부터 우리나라 대학사회의 크나큰 주목을 끌었다. 아마 포항공대처럼 개교 당시부터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대학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대학은 세계 경쟁력을 이겨내는데는 여러가지로 열악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속의 대학은 포항공대가 설립됨으로써 그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987년 12월16일자로 나는 교양학부 국어담당 교수로 발령받고 입학업무에 참가하였다. 그 당시에는 대학입시문제를 교육부에서 받아와서는 대학별로 입시를 치루었다. 국어시험에는 짤막한 논술문제가 몇 개 출제되었기 때문에 이것의 채점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겨울 계절강좌 도중 뜻하지 않은 눈병이 나서 경북대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할까? 눈병때문에 새 학기가 되어도 수업을 할 수 없었고 5월 초에 가서야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하고 3개월만에 학교에 오니 포항공대신문사 주간이라는 보직 발령이 나 있었다. 나는 눈 때문에 당분간 더 쉬어야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김호길 학장에게 말씀드렸더니 “다 나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해도 돼요. 너무 신경 쓰지 마이소”라고 하셨지만 1988년 10월 드디어 ‘포항공대신문’이 창간되었다. 그리고 1998년 2월 주간직을 그만 둘때까지 10년 동안 ‘포항공대신문’과 더불어 나는 정신없이 보냈던 것이다. 지나간 것은 전부 아름답다는 말이 있듯이 이 포항공대신문 주간교수직에 있으면서 전국주간교수협의회 일에도 참여하여 감사, 이사, 부회장, 회장직까지 맡아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내가 회장으로 있을 때 쿠바에까지 연수차 갔었으며 캐나다와 미국의 대학신문 실태를 살펴보러 갔었다. 일간으로 발행하는 하버드대에는 독자적인 신문사 건물이 있었으며 연간 예산이 20억 달러라는데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그때 주간직을 맡았던 각 대학교수들을 만나면 그때가 즐거웠다며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포항공대신문’이 한때는 전국대학신문 콘테스트에서 대상과 편집부문 우수상을 받는 등 포항공대는 신문까지 선구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는데 그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대학신문기자로 편집국장까지 지냈으며 내가 근무한 학교마다 신문을 창간하여 육성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서 지금의 포항공대신문을 보노라면 내가 왜 그렇게 열정을 쏟았는가 하고 회의가 가는 것이다. 신문편집도 예술이다는 나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12시간의 수업을 해가면서, 포항공대신문 때문에 안식년도 한번 가진 적이 없다.

박태준 이사장이 써주신 포항공대신문이라는 한자 제호도 이사장이 바뀌었으니 제호도 바꾸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나는 거부하였다. 나중에 박 이사장이 이 사실을 아시고는 “김교수 때문에 감격했어요”라는 인사까지 들었다.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박 이사장 만큼 포항공대를 사랑하고 애착을 가진 분이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졸업생 앨범에 박태준 이사장과 김호길 총장의 사진이 빠졌을 때 졸업앨범 준비위원 학생에게 야단을 친 적이 있다. “너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진 다 없애버리느냐?”고.
사실 대학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야단치는 교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학생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학교 학생들은 공부벌레라는 별명이 붙은 것처럼 대부분 착하고 순수하다. 공부하는 것 외에는 가르쳐 주지 않아서 예의범절이 부족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 가야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내게 물어보러온 학생을 야단쳐 보낸 적이 있다. 이런 것은 아무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판단력이 서지 않는 것이다.

신문사 주간 10년 동안에 수많은 학생기자들이 입사했다가 퇴사하였지만 제대로 인사하러 오는 학생이 드물다. 노벨동산에서 졸업생들의 결혼식 주례를 많이 서 주었지만 제대로 인사하러 오는 신랑, 신부가 드물다. 일요일날 주례을 맡으면 다른 볼 일은 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대 간다고 연구실에 와서는 큰 절을 올리는 학생을 볼때면 하루의 피로도 말끔이 사라진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공과대학의 특성상 공부방식을 가르쳐 주는 교수는 많아도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는 교수는 드물지 모른다. 인생의 평가는 공부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학생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의 문학 수업시간에 타대학에 다니는 애인을 강의 듣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학생이 있기에 대학은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맡았던 다솜, 연극, 문학 동아리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아름다운 노벨동산에서 노벨상 수상자는 언제쯤 나올까?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도 출근하면 노벨동산을 찾는다. 역시 노벨동산은 따뜻한 봄날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오늘도 가슴에 되새겨 본다.

1962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의 어느 여자고등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지 어느덧 40여년이 되었다. 어려운 시절 대학원 같은 학과에서 여섯명이 열심히 공부하고 술 마시고 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다 쓰러지고 나 혼자만 남았다. 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한 것인데 이 노벨동산에서 정년을 맞이하고 자유인이 되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포항공대는 재미없는 천국 같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를 찾으면 재미있는 천국이 될 것이다. 떠나는 뒷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이 노벨동산에서의 생활이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