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계단] 우리 반미하면 어떨까
[78계단] 우리 반미하면 어떨까
  • 유정우 기자
  • 승인 2002.12.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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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광화문 앞에서 어둠을 가르는 작은 촛불들이 하나하나 불을 밝혔다. 이는 억울하게 죽은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거리모임이었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www.antimigun. org) 등 네티즌들이 자주찾는 게시판을 통한 온라인의 반미(反美)시위가 오프라인까지 확장된 것으로 2,30대의 네티즌은 물론 중고생까지 모여들어 예전과는 달리 모든 계층이 함께하는 반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27일 전국의 중·고·대학생들이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 것을 제안하며, 메신저를 통한 근조리본(▷◁)에 이어 우리식 삼베상장(▩)을 달자는 캠페인 역시 전국에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희생이 있었고 그 때마다 끊이지 않고 시위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동안과는 달리 어떻게 탄력적으로 밑에서부터 지지를 받으며 모든 계층에 걸친 반미 운동을 이뤄내고 있는 것일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중고생의 하나였고 이제 작은 사회인, 대학생으로 사회에 내딛은지 얼마되지 않은 나에게도 반미는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일이자 무거움이었다. 386세대로부터 전해들은 반미는 붉은 글씨이자 무거운 논조, 일부 운동권의 이야기였고 그들에게 있어 미국은 우리 현대사의 모든 비극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미국의 무거움을 어깨에 얹은 반미였고 그들에게 느낄 수 있는 반미 역시 나에게는 어쩐지 낯설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언론에서 접하는 소파(SOFA)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 역시 너무나 뻔한, 이걸 누가 모를까 하는 내용뿐이었고, 대체 우리 어른들은 이런 것을 반미로 생각했나, 아니면 스스로 미국에 짓눌린, 반미를 하면서도 항상 무거워야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반미는 그러했다. 수십년 동안 은밀하게, 무겁게 전해지던 반미라는 구호는 일부 운동권의 이야기, 또한 이를 알게 모르게 억누르는 사회 기득권과의 무겁고도 끊이질 않을, 그러나 승리의 길은 먼 싸움이었다.

그런데 올해초 이 무거운 반미가 우리사회에서 누구나 쉽게 접하고, 누구나 ‘가볍게’ 참여할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바로 오노에 대한 분노이자, 미국에 대한 분노로 촉발된 반미운동이었다. 이런 가벼운 반미는 도리어 지금껏 무거운 반미를 해오던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즉흥적인 이벤트이자 속좁은 민족주의의 발로였다. 단순히 금메달을 돌려달라는 요구, 골 세레모니로 이벤트화하는 반미는 예전의 무겁고 심각한 반미가 아니었다.

더 이상 우리 세대에 있어 무거운 반미는 없다. 아니 무겁고, 가벼운 반미는 없다.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서 우리의 생각 역시 변했다. 비록 어른들보다 미국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혹자는 이를 여전히 유치한 감정 표현으로 폄하하며 반미의 본질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한다. 그 많은 미군 범죄에는 조용하다가 눈에 드러나는 사건에만 냄비처럼 들끓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반미는 패배주의에서 벗어난 반미이다. 더 이상 미국이 싫어서 반미가 아니라 우리는 상식이 아닌 미국이 싫어서 반미를 한다. 은밀하게 오고가던 반미는 없다. 메신저에 붙은 추모리본과 삼베, 미국 상품 불매운동, 007영화를 보지 말자고 외치는 내 또래들과 수많은 네티즌들. 이젠 우리 생활의 반미이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이게 어느 나라 법이냐”상식을 기반으로 한 우리들의 반미는 그 잘난 어른들이 혀를 차며 경박하다, 단순한 감정의 발로로 넘기지 마라 하는 충고 반, 걱정 반마저 뒤로 넘기며, “퍽킹 유에스에이”를 외쳐대는 반미이다. 우리의 반미는 그만큼 실천력이 있는 반미이자 자신감있는 반미이다.

그동안 조용하던 메이저급 기성언론은 부시의 사과가 나오자마자 이를 마치 거대한 소득으로 여기고 이젠 우리의 당돌한 반미가 수그러들길 바라고 있다. 광화문의 촛불 추모나 반미 시위에 대한 기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이 국익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미국의 편에 서있든, 아님 반미를 단순한 감정주의로 치부하든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한국’은 우리에게 또 다른 분노심을 심어주고 있으며, 노력은 커녕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 특별히 불평등하다고 보지 않는다’ 는 법무장관의 말에는 분노에 앞서 비애마저 느껴진다.

여태껏 없었던 이런 온-오프를 통합한 국민들이 하나된 대대적인 시위가, 더 이상 골방이 아닌 밖으로 대중으로 나온 반미가 국민들의 자발적인 자세로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오던 무거운 반미가 아닌 밑의 중, 고, 대학생에서부터의 시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얻어낸 작은 성과일 것이다. 아쉽다면 이를 얻기위한 댓가가 꽃다운 여중생의 두 죽음이었다는 점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도 변하며 우리의 반미도 변했다. 언론의 벽과 보이지 않는 사회의 장벽에 골방에 갖혀있던 반미는 이제 이데올로기의 틀을 던졌다. 그리고 이젠 당당히 우리의 목소리를 내며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 심장부에 하나 둘 불밝힌 작은 촛불들은 시대의 어둠을 밀어올리고 헤드라이트보다도, 네온사인 불빛보다도 더 밝게 올랐다. 이제 무거운 반미도, 가벼운 반미도 없다. 남의 나라 알기를 엿으로 아는 미국과, 그 옆에 붙어 자기 이익 챙기느라 바쁜 놈들 앞에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 같이 하자. 더 이상 ‘불편한 소파’에 앉아있지 말고 우리 반미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