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논단] 정치적 활동 언제까지 제한만 할 것인가
[독자논단] 정치적 활동 언제까지 제한만 할 것인가
  • 탁은창 / 생명 96
  • 승인 2002.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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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약서를 기억하는가. 1998년 개정된 학칙에 의해 이후의 새내기들은 더 이상 서약서를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 이름은 많이 잊혀졌을 테다. 필자가 입학할 당시에는 필히 서약서를 제출해야 했다. 서약하지 않으면 입학허가가 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입학 이후 서명하지 않았다는 친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꼭 그렇지만은 않았나 보다. 서약서의 내용은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서약서를 온라인 회원가입 약관 읽듯 흘려 읽고, 재빨리 서명한 터라 기억나는 바가 없다.

서약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기에 과연 무엇을 서약했는지, 다시 말해서 어떤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 했는지 추리할 요량으로 학칙을 검토해 보았다. <학생활동>에 대한 조항인 학칙 제21장 중 ‘학생활동 제한’에 관한 제73조에는 다음과 같이 1. 학내에서의 정치적 활동 2. 학외에서 대학명의의 정치적 활동 3. 대학의 기본 기능 수행을 방해하는 행위 4. 기타 교육 목적 및 학내질서 유지에 위배되는 행위에 대하여 처벌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학칙에는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런 조항이 학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약서를 작성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없다. 서약서엔 뭔가 다른 조항이 존재했던 것일까. 서약서 꼼꼼히 읽어볼 걸, 참 후회스럽다.

이렇듯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정치적 활동’이란 조항은 그 의도와는 다르게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치란 단어는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 단어를 명쾌하게 정의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범위, 행동방식, 계급의 문제 등으로 나뉠 수 있는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치의 의미에 관한 구절이 있다. 정치는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의견의 차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라는 게 그것이다. 이를 긍정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활동이라 하자. 그렇다면 ‘정치적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학칙은 이런 것들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의 이해를 우선하고, 의견에 차이가 생기면 목소리를 높여라?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애써 곡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대학생의 ‘정치적 활동’은 정치란 단어의 공통적 의미에서 발견되는 그런 역할보다는 투쟁과 운동에 가까웠고, 학교는 이를 우려했던 것일 테다. 하지만 시대상황이 변화했음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규정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정치적 활동’의 제한이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요즘 사회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국민으로서의 당당한 권리를 행사하자면서 ‘참여정치 구현’의 목소리가 높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질타하면서 말이다. 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가. 교문 밖을 나서면 ‘정치적 활동’ 외면하면 무관심하다고 손가락질 해대고, 이와 반대일 경우 학칙에 의해 징계사유가 되고걖?
현재 학내에는 개혁국민정당과 민주노동당 당원이 다수 있다. 그들이 역사인식과 사회인식을 가지고 현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물론 ‘정치’적 활동이다. 기숙사 생활에서 발생하는 사생들 사이의 문제, 학생들과 교직원들 혹은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역시 ‘정치’적 활동이다. 이렇게 건전하고 진취적인 자세로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서로의 학생들과 학교측의 입장 차이로 인해 ‘정치적 활동’이라는 이유로 제재 받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학교에서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사회의 리더로서의 과학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전인교육을 위해 교양교육을 확대하고, 다양한 세미나와 교류를 통해 기술 이외의 것들에 학생들이 눈 뜨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하고, 의사소통과 문제해결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여 본 경험이 없는 지도자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자치단체 활동에 대한 저조한 관심과 참여, 공론화 시키는 데 늘 어려움을 겪는 교내 BBS, 같은 거주 공간 이용자들끼리의 소통의 부재 등의 학내 문제는 사회의 리더를 키우겠다고 표방하는 교육이 얼마나 겉돌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정치적 활동’을 제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자. 어둡고, 혼란스럽고, 투쟁적인 ‘정치적 활동’이 서서히 모습을 바꿔가고 있는 이 시점에 밝고, 긍정적이고, 화해적인 ‘정치’적 활동을 제안하고, 실행하자. 제반 사회 관계에 대한 이해와 타협, 포용력과 리더쉽은 사회적 리더로서의 필수 조건이다. 이러한 능력을 함양하는 데 ‘정치’적 활동의 경험만한 것이 없다. 지도자로서의 과학기술자를 꿈꾸는 포스테키안들은 자신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과 현재 학칙이 얼마나 모순되는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