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沙工)만 많은 과학기술정책
사공(沙工)만 많은 과학기술정책
  • 김정묵 기자
  • 승인 2002.06.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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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망설이지 않고 21세기를 바꿀 과학의 성과로 꼽을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 천문학적인 연구비와 엄청난 연구 인력이 투입된 이 계획은 달하는 미국 정부의 무제한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이러한 성과의 달성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1990년대 초, 미국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던 거대 규모의 연구사업은 초전도 충돌형가속기(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SSC) 건설 계획과 인간게놈 프로젝트였다. 둘레 97km에 달하는 거대한 가속기의 건설을 통해 미립자와 우주의 구조를 밝히겠다는 SSC 계획과 인간의 유전 정보를 밝히겠다는 HGP, 양쪽 모두 치열한 로비활동을 펼쳤지만, 불치병 치료와 신약 개발을 내세운 HGP에 비해 각종 첨단 공학기술의 발전을 내세운 SSC계획은 탈냉전 시대의 정치인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1993년 사장되고 말았다.

어느 학문이나 연구 지원이 필요하겠지만 과학기술 분야는, 특히나 연구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20세기 이후의 과학기술 분야는 일개 개인이나 대학, 기업 등의 후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가 되어 국가 차원에서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지원은 과학기술이 곧 국력으로 직결되는 현실에서 국민적 합의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광복 직후의 척박한 국내 과학계의 현실 아래에서 구미처럼 자생적 연구의 기반 위에 지원을 하는 형태가 아닌 국가가 나서서 육성하는 과학기술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소위 기술만이 살 길인 나라에서의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 진흥은 고도성장에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으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아직도 여러 가지 폐해를 보이고 있다.

정책의 일관성 부족은 대표적인 한 예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지어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정책, 담당자가 바뀌는 우리의 현실은 단기간에 좋은 성과가 나오기 힘든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쥐약'이라 할 수 있다. 1959년 문을 연, 국내 최초의 본격 연구기관인 원자력 연구소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대우로 국내의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었고 이러한 인재들을 꾸준히 유학보내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보였으나 1971년까지 11년동안 소장이 9번이나 바뀌는 혼란을 겪다가 귀국한 인재들이 다시 출국하거나 원자력과는 무관한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등 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 외에도 신군부 출현 이후의 정책변화 과정에서 KAIS-KIST, 한국선박연구소-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 통폐합 등 정부출연연구소 통폐합 과정은 연구 활동 위축, 연구 인력 누출 등 큰 혼란을 빚었다.

깊은 이해에 기초하지 않은 사업 선정 또한 문제이다. 과학기술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기초과학 분야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음은 오래된 문제이며 최근 과기부가 선정한 창의연구사업단에 선정된 11개 사업단 중 7개가 나노기술 관련 신청인 것은 단순히 유행을 보고 정책을 정하는 광경이다.

현재 우리 대학을 비롯, KAIST, KIST, 성균관대 컨소시엄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국가 종합 나노팹 연구센터 선정이 계속 늦춰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폐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당초 4월말로 잡혀 있던 선정 발표가 별다른 이유없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상황은 지방 자치 단체의 적극적 개입과 로비 의혹 등으로 내내 잡음이 그치질 않았던 선정 과정이 발표 후 일으킬 파장을 우려한 과기부의 시간 끌기로 보인다.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지역적 안배 고려는 그나마 수긍할 수 있으나 지방자치단체들의 과도한 개입에 의한 논란-특히나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가까이 다가온 상황이라-은 과학기술 정책이 정치적 이유에 의해서 흔들리는 모습이다. 또한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과기부의 '제 새끼 키우기' 논란 또한 나노기술전문연구소를 정부출연기관으로 한정한 나노기술개발촉진법과 맞물려 관료적 정책 결정 구조의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학기술 연구 규모가 방대해짐에 따라 국가적 지원이 불가피해진 현재, 국민의 혈세가 쓰이는 연구 지원에 국민의 동의를 얻기 위한 정치적 과정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비전문 관료 조직인 정부와 표를 의식해 장기적 안목의 정책을 펼 수 없는 정치에 과학기술정책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지금의 풍토에서 과학기술강국이 되겠다는 미래 청사진은 한낱 '장밋빛 꿈'에 그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