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여덟오름돌] 누구를 위한 '공평무사'인가
[일흔여덟오름돌] 누구를 위한 '공평무사'인가
  • 김정묵 기자
  • 승인 2002.03.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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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정치부 기자의 뉴스 메일은 선거전을 보도하는 기자들의 고충을 전하였다. 경마 경기 중계로 비유되는 선거전 보도이지만 경마 중계와는 달리 그 보도 자체가 선거전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일종의 피드백 효과를 가졌기에 사실 보도마저도 그것이 지니는 영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관전자이고 싶은데 플레이어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가지는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고충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언론이 ‘관전자’로 남고 싶어 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언론이 이러한 딜레마에서 어떤 쪽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난 작년 10.25 재보궐선거 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출입기자들에게 ‘립서비스가 아니라 정말 한식구로서 너무 애썼다’며 승리자로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말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힘든 말을 공개적으로 한 바 있다. 이는 언론이 ‘관전자’로 남기보다는 ‘플레이어’로서의 역을 자임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지자체 선거와 ‘가장 큰 선거’인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를 맞아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에 뒤이어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동아일보 김석훈 사장 등이 지면상에서의 공평무사를 다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올초 기자협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언론사가 특정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무려 87.1%로 나타난 것은 그동안 선거철마다 강조해 왔던 언론의 ‘공평무사’함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실제로 아직 본격적인 대선 국면은 아니지만 민주당의 국민경선이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엄청난 흥행에 성공하며 ‘노풍’이 일자, 조선겣옛팀瞿린?일제히 문제 제기 당사자조차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는 ‘음모론’을 청와대와 노무현측에 추궁하고 나섰고, 중앙일보는 거짓으로 판명난 ‘서민을 가장한 귀족 노무현’에 대한 만평을 싣는 등 아직도 진행 중인 민주당 국민 경선 판도에 개입하고 있다.

이렇게 지키지 못할, 아니 지킬 마음이 없는 중립에 대한 집착은 신문의 이익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 10위에 드는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조선일보를 비롯해 중앙, 동아가 전체 국내 일간지 발행부수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 또한 여타 신문들도 전국지가 대다수를 이루는 상황은 이들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들의 정치적 성향, 계층-연령-지역 분포의 다양함을 나타낸다. 곧, 중립을 지키지 않고 특정 후보 또는 정책에 대한 지지가 공개적으로 이뤄질 경우, 이에 따라 독자들의 반응으로 발행 부수가 줄어드는 등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뚜렷한 지지를 밝히지 않음으로 언제든지 양비론이라는 초월적 경계에 위치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매력적일 뿐더러 흥행에 유리한 선거 비리 등에 치중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중립’의 두려운 면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음성적으로 특정 후보-당을 지원하여 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여 ‘부적절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대다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식상함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후보-정책에 대한 명확한 검증을 통한 뚜렷한 호오(好惡) 구분의 부재는 유권자의 관심을 후보-정책에서 떠나게 하고 이는 다시 후보에게 정책 부재와 속 빈 이미지 관리, 지역주의 조장에 치중하게 한다.

선거전에 임해 언론이 공정한, 편파적이지 않은 사실 보도와 비판을 하는 것은 기본이자 상식이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가치관이 판이한 사회에서 같은 사안이라도 모두 다른 시선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언론 역시 이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언론이 자신의 성향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들을 바라볼 필터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언론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여론 선도라고 할 때 자신들이 선도해 나가는 지향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후보-정책에 대한 공개 지지는 면밀한 분석과 평가를 수반하여 상대적으로 정보에 취약한 일반 국민들에게 분명한 선택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게 하며 이는 피선택자인 후보겢玲?분명한 정책과 명확한 공천 기준을 제시하도록 하는 압력이 되어 궁극적으로 우리 정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 모두에게 딱 맞는 하나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답을 지닌 구성원들이 공론의 장을 가짐으로써 가장 적합한 답을 인정받는 과정이다. 가장 힘있는 구성원 중 하나인 언론은 뒷짐지고 다른 의견을 동어 반복한다든가 몰래 다른 구성원을 밀어 주는 것을 지양하고 공론의 장에 충실히 임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