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기피현상을 접하며
이공계기피현상을 접하며
  • 이동엽 / 기계 박사후연구원
  • 승인 2002.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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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진학자들의 이공계기피현상을 여러 일간지에서 다루면서 정부와 학계는 뒤늦게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우수인력의 비정상적인 의학계열 편중 지원과 고급두뇌의 해외유출 현상까지 불거져 나오며 과학기술인들은 물론 국민들도 이 문제에 어느 때보다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듯 한 일간지에서는 이공계 기피현상을 다루는 독립적인 게시판을 마련했고 이공계인력의 처우개선에서부터 자성의 목소리까지 매우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었다.
필자도 한 명의 과학기술자로서 논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일정기간 동안 개진된 여러 의견들을 읽고 때로는 필자의 주장을 펴기도 하면서 점차 이공인들의 주장이나 현실보다는 오히려 타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기술자에 대한 인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관련 글들을 읽은 지난 몇 주의 시간은 실험실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실험장치와 컴퓨터와 씨름하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과학기술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회적 지위가 현실사회 안에서는 얼마나 허구에 불과한 것인지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다소 엉뚱할지 모르지만 지난 2000년 의약분업의 시행과 그에 따른 의료계 총폐업을 떠올려 보자. 당시 의료계는 ‘의권’이라는 정체불명의 권리를 명분의 하나로 내세웠으며 많은 지식인들이 그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들이 사회현실을 껴안지 못하고 의료행위 자체에만 갇혀있을 때 의사들이 추구하는 최선의 진단과 진료는 오히려 일부 계층에게 빈곤한 의료서비스를 강요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일반국민의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합의를 무시한 의사들의 요구에 많은 이들이 그 무책임함을 지적했으며, 어떤 이는 국민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난 의료계 총폐업으로 인해 의사들이 권위는 여전히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존경은 잃어버렸다고 꼬집었다.
이제 다시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 그러면 한국이라는 사회 내에서 과학기술자들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국민들이 바라보는 우리는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혹 일반인들에게 비쳐지는 과학기술자란 이상한 장치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갖는 이방인이 아닐까. 실험실 안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요구하는 사회적 위치와 처우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감히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다. 그것은 단지 직능에 충실한 것일 뿐, 사회 지도층으로서 엘리트로서 평가받고 그에 따른 합당한 처우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정책을 포함한 사회문제에 대해 과학기술자들의 목소리가 그동안 너무도 미약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며, 그 원인이 사회 시스템에 있든 개인에게 있든 그 일차적인 책임은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본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특례기간 단축이나 단기적인 처우 개선의 요구가 아니다. 우리가 보다 근본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이 나라의 생존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과학기술정책의 입안과 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이러한 정책이 정권교체와 같은 외적인 요소와 관계없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추진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것은 과학기술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적어도 과학기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회문제에 대해 과학기술자들의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사회에 합당한 지위와 처우를 요구할 수 있으며 사회 또한 흔쾌히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기여를 인정하고 적절한 처우개선의 요구에 공감할 것이다.
이공계기피현상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에야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첨언하자면 위에 언급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과학기술인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여 좋은 시스템을 제안하고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며 그러한 노력이 단발로 끝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그리고 합리적인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단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주축이 되어 이미 이러한 노력을 시작했다는 소식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올해 2월을 기점으로 학생 신분에서 연구원 신분이 된 필자는 요즘 퇴근하고 연구원 숙소로 돌아가 대학 때 읽었던 ‘과학사’를 다시 읽고 있다. 책을 통하든 삶의 현장을 통하든 현재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한국사회 내에서 과학기술자의 정체성 찾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