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의 비전은 무엇인가? “비전”에 대해 생각하면, 앞에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그곳을 향해 저돌적으로 진격하는 것을 연상한다. 언젠가 우리 학생들에게 “자네들의 비전이 무엇인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대학 교수 되는 것”, “큰 사업가가 되는 것”, “훌륭한 아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되고 싶은 거지?” 모두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 목표만 설정을 하였지 정작 왜 그 목표를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신의 편안함과 안정, 행복을 추구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이 비전들이 하나씩 성취될수록 행복할 것 같지만, 사람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아 보이는 것들을 향해 손을 뻗친다. 20세기 세계 최대 부호인 록펠러는 43세 때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다. 한 기자가 물었다. “록펠러 씨, 당신 재산의 1년 이자 수입만 해도 웬만한 거부의 전 재산보다도 많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시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록펠러는 대답하였다. “조금만 더”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외적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부분, 이 부분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가끔 듣게 된다. 왜 자살을 하는 것일까? 품었던 비전이 현실로부터 멀어졌을 때, 절망감을 갖게 되며, 내일 삶에 대해 기대감을 잃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품었던 비전이지만 성취될수록 만족하지 못하며,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으면 삶까지 마감해버리는 이러한 비전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무엇이 올바른 비전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는 삶이다. 우리는 자기의 것을 나눌 때, 비로소 참 기쁨을 갖는다. 동물사회의 생존원리가 ‘약육강식’ 임을 배운 바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돕고 세우는 사회. 이런 사회가 되었을 때, 우리사회는 보다 온기 넘치는 사회가 될 것이다. “배워서 남 주나?” 이 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했다. “배워서 남 주자” 라고. 진정한 부자는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TV에서 자폐증을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삶에 대한 프로를 본 적이 있다. 이 청년은 길거리에 좌판을 펴고 기쁜 모습으로 손거울을 팔고 있었다. 기자가 다가가 물었다. “불편한 몸으로 이렇게 힘든 장사를 왜 하십니까?” 그 청년은 대답하였다. “돈을 벌려구요. 북한의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평양에 학교를 세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돈 벌어서 그 학교 세우는데 보탬이 되고 싶어요” 이것이 비전이다. 비전은 우리에게 삶의 기대감을 주며, 긍정적인 삶을 제공한다.
올해 졸업생 대표는 졸업사를 통해 이렇게 말하였다. “시작과 끝은 항상 함께 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뒤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시작이 있었듯이 끝이 있고, 죽음 그 뒤에 새로운 시작이 있지 않을까? 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 이 마음을 가졌을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대해 올바른 비전을 정립할 수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목 마른 자에게 물 한 모금을 나누어주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며,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의 위로를 줄 수 있는 삶, 이것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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