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읽고
‘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읽고
  • 김종흠 / 생명 조교수
  • 승인 2024.02.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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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과의 선배 교수님께서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하셨다. 한국계 미국인 과학자이자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인 캐럴 계숙 윤이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을 주제로 쓴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이었다. 책 표지가 아름다웠고, 제목 또한 흥미로웠기에 나는 금세 호기심을 가지게 됐다. 이 책은 생명의 분류에 기본이 되는 수많은 규칙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자연의 체계’라는 생명의 세계 전체를 체계화한 칼 린나이우스(칼 린네)로부터 △수리분류학 △분자분류학 △진화분류학으로 이어지는 분류학의 발전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 분류학이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점차 분류학자들의 주관적인 분류로부터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한 현대분류학으로 발전했고,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객관적이지만 불행히도 우리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세계와 단절시키는 비극으로 안내하고 있다고 말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단적인 예는 바로 ‘물고기의 죽음’이다. 진화분류학적으로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정확한 분류군이 아니다. 진화분류학은 생명 진화 계통수 하나의 완전한 나뭇가지, 즉 한 조상의 모든 후손을 포함하고 다른 것은 포함하지 않는 분류군만을 진정한 분류군으로 여기는데, 어류는 이 관점에서 보면 생명의 나무에서 완전한 가지로 떼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류로부터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등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후손을 포함하지 않는 한 어류만은 진화적 분류군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대로 현대분류학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이미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자연으로부터는 멀어졌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도 논리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질서 정연한 과학에서 더 이상 자연을 느낄 수 없을까? 이 책의 작가는 그 원인이 자기 눈과 귀로 직접 자연을 느꼈음에도 우리가 느낀 것이 정말 무엇인지 알기 위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과학적 사실에만 의존하며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과학에 의존하며 과학자들이 정해주는 대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자연에 흥미를 잃으며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의 삶이 너무도 바빠서 과학이 정해주는 대로만 수동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는 점점 밖에 있는 생명과 단절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분류학자였다. 어린아이들도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과 비슷한지 아닌지 쉽게 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연구에서는 8명의 아기가 처음 배운 25개의 단어 중 사람을 포함한 동물을 가리키는 단어는 10개 이상이었고, 음식을 포함하면 13개였다고 한다. 또한 크기와 모습이 다양한 견종도 쉽사리 개라는 동물로 인지한다. 이렇듯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생명을 분류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지된 세계, 이것을 ‘움벨트’라고 하며 초기 분류학은 이를 인지하는 능력에 의지해 시작됐다. 이는 분류학이 학문으로 체계화되기 이전부터 생명을 분류하는 것이 생존에 필수였던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유산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서 과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과학을 공부하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앞서 말한 객관적 데이터를 통한 현대분류학이 처음부터 우리를 자연에 무관심하게 만들려는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과학은 여전히 자연이 어떤 모습인지 아는 것이고, 또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런 것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식물을 공부하는 나에게 가끔 생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것은 보통 생명에 대한 ‘왜’라는 질문을 생각할 때다. 식물을 공부하다 보면 가끔은 식물이 나에게 직접 ‘이것은 이런 이유로 이렇게 된 거야’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때가 있다. 최신 연구 기법으로 얻은 데이터를 논리적으로 분석해 봐도 가끔은 ‘왜’ 생명이 이렇게 돼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나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나의 고유 ‘움벨트’를 통해 배양실에서 자라는 식물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거나, 자연으로 나가 연구실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식물을 보고 느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