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 불가능한 삶
환원 불가능한 삶
  • 조민수 / 컴공 부교수
  • 승인 2023.11.0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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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자 인간만이 가진 삶의 특권이다. 나는 매년 학부생들에게 추상적인 자동기계를 만들고 그 특성을 탐구하는 계산이론 과목을 가르친다. 수업 시간에 다루는 기계는 형식적인 기호들로 부품과 동작이 정의되는 추상적인 기계일 뿐이지만, 주어진 법칙하에서 사용 가능한 부품들을 조립하고 기계를 만드는 원리는 현실 세계의 물리적인 기계와 원칙적으로 다를 게 없다. 이런 정교한 기계를 탐구하는 작업이 우리 삶과 세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을까? 20세기 중반에 이 순수한 이데아 세계 속에서 어떤 보편 계산 기계 하나가 발견됐고, 그것이 다양한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우리 앞에 존재하는 컴퓨터가 되었다는 이야기. 이 역사적 신화를 들려줄 때면, 나는 어느새 관념론자가 돼, 학생들에게 ‘정신’과 ‘물질’ 중에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이라 생각하는지를 던지듯 물어보곤 한다. 이때, ‘당연히 물질이 근본적이고 모든 것들을 환원적으로 설명한다’는 통속적인 답변을 마음속에 담아두었을 학생들을 위해, ‘기계’에 관련한 몇 가지를 끄적여 본다.  

기계의 기능은 ‘개별부품의 기능이 무엇이었는지’와 ‘그들이 어떤 구조로 결합돼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부품의 기능과 결합 구조에 따라 그에 걸맞은 놀라운 기능을 가질 수도, 아니면 반대로 형편없는 고철덩이가 될 수도 있다. 기계를 설계하고 그 특성과 행동을 탐구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기계가 가진 이런 구성 원리 (compositionality)와 함께 이에 대응되는 인간의 놀라운 구성 능력을 확인한다. 구성 원리를 바탕으로 정교한 기계를 만들어 나가는 이 과정은 수준 높은 취향을 가진 우리에게 독특한 쾌감을 선사하는데, 부품을 결합하는 무한한 방식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인간의 능력에는 무언가 신비스러운 면이 있다. 최근에 비약할 만한 발전을 이룬 거대 인공지능 모델들이 실제 이러한 구성원리를 어느 정도까지 학습해내고 있는지는 지금도 계속되는 논란거리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조립된 기계와 부품들의 관계를 유심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개의 층위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층부’에서 각 부품은 모두 이 세계의 물리·화학적 법칙들을 따르지만, ‘상층부’에서 기계의 구조가 부품들에 부여하는 결합 관계는 하층부의 물리·화학적 법칙들 ‘위에’ 작용해 기능을 부여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말에 마구(馬具)를 씌워 목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기계는 부품들이 의지하고 있는 법칙들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부품들에 구조화된 제한을 가해 하나로 통합한다. 따라서, 기계는 두 개의 개별적인 원리들이 상호적으로 제어하며 동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상위 원리는 기계 설계의 원리이고, 하위 원리는 기계가 의지하고 있는 부품들에 부과되는 법칙들이다. 이때, 기계의 구조는 부품에 작용하는 법칙들에 마구를 덧씌우는 경계 조건들로 작용한다. 서로 구별되는 상위 원리와 하위 원리가 서로에게 봉사해 목적을 이루는 이러한 상황을 마이클 폴라니는 일찍이 ‘이중 제어’(dual control)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나아가 기계의 구조가 부품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못한다는 것, 즉 이 이중 제어 상황에서 상위 원리는 하위 원리로 환원돼 설명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이 단지 바둑의 법칙으로 환원돼 설명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중 제어 관계로 연결된 환원 불가능한 층위들은 비단 기계들에만 머물지 않는다. 분명 이런 층위들은 세계와 우리의 삶에 겹겹이 쌓여 다층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생물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고, 사회학이 생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의 이론이 요원한 이유, 그리고 내가 쓰는 이 글이 의미가 있는 이유까지도 이러한 환원 불가능한 세계의 구조에 기인한다. 물론, 다층적인 설명 체계는 단지 잠정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세상만사를 근본적인 하층부의 물질과 법칙으로 환원해 설명하려는 흐름은 곳곳에 여전하다. 나는 학생들이 이런 통속적인 환원주의에서 벗어나 더 폭넓은 실재와 의미를 포용하는 다층적인 세계상을 가졌으면 좋겠다. 섣불리 쪼개고 분석하고 설명해버리는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의미들이 세상엔 너무도 많다. 우리 삶은 항상 그 자체로만 설명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