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과학저널리즘의 과제와 대안
[특별기고] 과학저널리즘의 과제와 대안
  • 김학수 / 서강대 교수
  • 승인 2003.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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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저널리즘의 역할과 저널리즘 성격의 접점을 찾아야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처럼, 인간과 사회에 관한 한 목표 지향적인 그리고 가치 지향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사회과학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과학적 사고보다는 당위적(should, must), 규범적 사고를 서둘러 먼저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 당위적 목표에 대한 성취마저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과학 저널리즘에 대한 지나친 기대 말아야

과학저널리즘의 과제도 그것에 대해 지나치게 당위적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과학자일수록 과학저널리즘에 대한 높은 기대(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과학저널리즘에 대한 본질적 이해에 더욱 눈멀어지고 있다. 이것은 결국 과학과 저널리즘, 과학자와 언론인의 상호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널리즘은 기본적으로 정보를 팔아먹기 위한 언론사 기업활동의 일환으로 정보 자료를 수집, 가공하여 최종 상품으로 내보내는 일선 생산직 기능이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해서 저널리즘은 단순히 사(私)기업적인 이익 창출을 노리는 상업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을 공익적(公益的)인 활동으로 여기는 것은 이익창출 과정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부수적 효과 때문이다. 즉, 사기업적인 활동으로 공동체의 문제가 파헤쳐지는 그래서 더욱더 공공조직에 대한 객관적 감시가 가능해지는 순기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저널리즘을 통해 우리가 비싼 값(구독료 및 시청료 납부, 광고료의 소비자 전이)으로 구매하고 있는 정보상품은 곧 우리 사회의 문젯거리이다. 어떤 것이 공동체의 문제인가를 파악할 때만이 효과적으로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일수록 더 정보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널리즘에서 문제투성이 소식이 아니라 밝은 소식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이고, 선정주의는 그런 문제투성이의 소식에 대한 값어치를 더욱 부각시키는 장사 기법이다.

그렇다면, 과학을 이런 저널리즘의 활동에 접목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은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와 근본적으로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은 쉽게 이야기해서 자연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라 하겠으며, 그 던지는 질문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질서(given order)를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표피적인 세계, 즉 현상(phenomena)을 다루기보다 그 뒤에 숨어있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는 데 치중하는 것이 과학이다. 이런 점은 현상의 문제점을 좇는 저널리즘과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과학저널리즘 성공과 실패의 근원

과학과 저널리즘 사이의 이런 깊은 간격은 늘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렇다면 과학과 저널리즘이 가깝게 접목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학저널리즘의 성공과 실패의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또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과학의 실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은 실천의 관점에서 또한 연구개발(R & D)로 일컬어진다. 그 중에서 연구(research)는 질의응답 과정(question-answer process)이고, 개발(development)은 문제해결 과정(problem-solution process)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넓게 말해서 기본과학(basic science)은 전자인 연구에 더 가깝게 해당되고, 응용과학(applied science)은 후자인 개발에 더 가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과학과 공학의 차이 또는 과학과 기술의 차이는 바로 그런 실천 영역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칭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영역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런 다양한 영역들은 결국 “현상”과 “숨겨진 질서”사이의 어디쯤을 주요 대상으로 탐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흔히 이론과학자일수록 ‘숨겨진 질서’의 세계에 보다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럴 경우 탐미적(aesthetic)인 세계에 불과한 ‘현상’으로부터 더욱 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반면에 기술개발에 몰두해 있는 응용과학자는 현상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보다 크게 주목할 것이고, 따라서 현상으로부터 보다 가까이 있다고 하겠다.

이제 과학과 저널리즘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접점은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저널리즘이 현상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데 치중하고 있는 한, 현상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치중하는 응용과학이 기본과학보다 그리고 문제해결 과정의 개발(development)이 질의응답 과정의 연구(research)보다 왜 더 쉽게 저널리즘과 만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발견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 해서 왜 과학저널리즘이 순수과학을 멀리 하는지 그리고 개발 중심의 보도에 치중하는지, 심지어 순수과학의 연구결과를 어떻게 하면 저널리즘에 편승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지도 깨닫게 만든다.

과학의 영역에는 또한 과학정책(science policy)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공공의 문제(public problem)를 해결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예컨대,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을 어디에 건설할 것인지 또는 국가의 연구개발 예산을 얼마로 늘릴 것인지 등은 많은 국민의 이해관계가 얽힌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응용과학 내지 개발이 초점을 둔 ‘특정 문제’의 해결보다 저널리즘의 주목을 더 끌 수밖에 없다.

과학저널리즘은 결국 과학과 저널리즘이 접목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인 “문제”를 떠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문제-해결에 초점을 둔 개발과 정책의 보도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상기할 때, 과학저널리즘의 성공과 실패의 근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순수학술지에 게재된 연구논문의 내용을 정확성을 내세워 그대로 보도한다면, 그것은 이미 과학저널리즘이 아니다. 그 연구결과가 어떤 “현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맞닿아 있는지를 밝힐 때 우선 편집부 내에서 보도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언론수용자도 그 기사를 읽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 과학자는 과학저널리즘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저널리즘은 과학적 지식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일반국민의 과학적 소양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우리가 엄청나게 받은 과학교육으로부터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과학저널리즘의 소임은 과학기술의 해결력이 어떤 현상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기여하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다.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얻는 부수적 효과는 과학기술에 대한 의미 있는 강한 ‘인상’이다. 그 인상은 경이일수도, 매력일수도, 두려움일수도, 아니 단순한 사실일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걸러지고 누적될 때 지식이나 태도가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처럼 단번에 지식과 태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저널리즘이 과학기술에 대한 어떤 강한 인상만이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굉장한 성과이다. 그렇게 하는 데 과학자도 그리고 일반 언론인도 할 수 없는 과학저널리즘의 고유영역과 전문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김학수 / 서강대 교수 / 김학수 교수는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이며 재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 과학문화아카데미 운영위원장을 맡고 계시는 등 우리나라의 과학저널리즘과 과학커뮤니케이션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