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창규 / 인문사회학부 대우조교수
  • 승인 2022.02.26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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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학은 쉬었다. 학과의 정규직 교수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위의 교수들은 제각각 업무와 연구로 방학을 채운다. 개인적으로 나는 논문을 쓰지 않는 첫 방학을 보냈다. 기억하는 한 처음이다. 작년 12월 방학을 시작하고 나서 자연스레 쉬고 있었다. 마치 여느 방학과 다름없이 자연스러웠지만, 논문 생산에 돌입하지 않은 첫 방학이었다. 낯선 변화가 자연스러운 시간처럼 내게 찾아온 것이다.
논문 작업뿐만이 아니었다. 겨울 방학 즈음해서 지난 10년여 이끌어오던 세미나를 정리했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 밑바닥부터 시작했던 공부의 한 축이었다. 나는 한국의 근대 소비문화 연구로 박사 논문을 마친 후에 여러 학교의 연구자들과 시작한 ‘돈과 인문학’ 세미나를 10년간 꾸려왔다. 간간이 우리대학 POVIS 게시판에도 세미나 행사를 홍보한 적이 있다.   
오랜 공부 모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정리했다. 관계가 기울어진 이는 친구가 아닌 동료 연구자로 관계를 정리했다. 친구와 동료는 다르다. 친구는 가깝지만 동료는 가깝고도 멀다. 또 다른 지인에게는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요새 내가 정리 주간에 들어간 모양이니 나만 연락하는 관계라면 안 하련다’라고. 먼저 연락하지 않는, 지인의 특기를 모르는 바 아니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지인에게 한 번씩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지인이 어쩌다 한 번씩 연락을 한다. 관계를 정리하다 보니 어떤 친구는 동료 연구자가 되고, 어떤 이는 가깝게 지내게 된다. 다 마음의 일이고 인연의 일이겠지.
가족 관계에도 손을 댔다. 인간 존재는 불완전하며, 거리가 가까울수록 기쁨도 괴로움도 더한 법이니 가족 관계란 녹록지 않다. 나이 들수록 더하다. 관계는 복잡해지는데 감정은 묵어가는 탓이다. 나이 드는 부모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몫을 교통정리 하는 일을 시작했다. 오랜 관계는 일시에 해소되지 않으니 시작이 중요하다. 일련의 일들을 일기로 적다 보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벼워지고 싶다.’ 그리고 가벼워지고 싶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지치고 무거워진 상태를 일깨워줬다. 지친 몸과 마음은 제 살길 찾아 먼저 움직이고 있었는데, 생각과 의식이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과연, 2021년을 돌아보니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일을 많이 했다.
옛 기록을 들춰봤다. 분주한 달리기에서 놓여나니 일상의 면면에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연구와 교육의 제도화된 관례 속에서 분주하게 출세를 도모하는 와중에 어느 날 몸과 마음이 지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2022년 초입에 펼쳐본 10년 전 기록이었다. 학위를 마치면서 스스로 점검했던 욕망과 명분, 똘똘하기 그지없는 현실 인식을 기록은 담고 있었다. 10년 전의 내가 10년 후의 나에게 건네는 격려와 자극이었고 위로였다. 사회에 지치지 않아서 패기 있고, 현실 인식은 냉철하며, 이상과 현실의 관련을 깐깐하게 따지는 10년 전의 모습은 신선했다. 
옛 기록은 현재의 내가 망각한 것, 오해하기 쉬운 사실을 일깨워줬고 때아닌 위로도 건넸다. 내가 지쳐하는 일이 스스로 마음 낸 일이었고 열심히 해왔구나 싶었다. 일단의 결과는 성공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다. 이 글의 학생 독자들께 한 가지 비밀을 공유하자면, 성공과 실패로 나뉘는 일은 드물다. 절반은 성공이고 절반은 실패로 공존한다. 그러니까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은 작위적일 때가 많다.
더불어 기록을 권한다. 스스로 글쓰기를 업으로 아는 사람이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일기든 월기든 년기든 반년기든 상관없다. 희로애락의 감정과 현실의 부침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각 잡고 말하자면, 고위험과 복합위험의 시대에 정신 붙들고 사는 일은 큰 숙제다. 무엇이 숙제인지도 모르고 경주마처럼 달리는 데만 열중하거나, 다음 단계와 또 그다음 단계의 출세에만 묶인 영혼들도 숱하다. 어떻게 보면 개개인의 질주는 지구를 파괴해온 인간 문명의 편린인지 모른다.
물론 전력질주의 순간, 앞만 보고 달리게 되는 때도 있지만 계속 그러다 함부로 망가진다. 쉼이 필요하다. 숨을 고를 때 기록의 힘이 톡톡하다는 사실은 독자들께 이미 공유했다. 쉼의 힘을 느끼는 이즈음이다. 고백하자면 새로운 연구 방향과 공부 모임, 관계 맺기에 대한 에너지가 몽글몽글한다. 아직은 비밀처럼 소중히 키워낼 생각이다. 각별히, 곧 온라인 창으로나마 만나게 될 새내기들에게, 더 이상 경주마처럼 달리지 않는 자신이 불안한 영혼들에게 쉼의 기록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