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곡골목소리] 학교가 거대한 지곡 연못이 되어가는 것 같은 불안감
[지곡골목소리] 학교가 거대한 지곡 연못이 되어가는 것 같은 불안감
  • 유진경 / 신소재 97
  • 승인 2003.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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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은 단지 첫 문턱을 넘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외에도 처음과 끝 사이를 되돌아볼 때 어느덧 흘러버린 시간의 덧없음도 나타내 주는 말인 것 같다. 느낄 것 같으면 끝난다고 어느덧 졸업생이라는 신분으로 학교에 서게 된 것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하다. 입학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학교는 내게 있어 기회의 땅이었다. 때로는 흔들리기는 했지만 졸업하는 이 순간에 학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 외에도 작아서 느낄 수 있었던 독특한 유대감, 역사가 다른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천하다는 것에서 오는 특유의 긴장감, 학생 사이에 뚜렷한 조직과 위계질서가 없는 것에서 오는 참여의 개방성 등등 학교에 대해 자랑스럽게 열거할 수 있는 것이 무척이나 많고 그렇기에 학교에 감사한다. 이렇게 고마운데도 학교는 이번엔 과분하게도 개교 이래 최초의 총장 없는 졸업식이라는 영광스러운 행사까지 열어주려 한다. (물론 이를 대행하는 총장 직무대행이 계시기는 하지만...)

최근의 입시설명회나 진로박람회 등에서 포항공대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과 인지도에서 전에 없는 향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관심의 반대급부로 총장대행체제의 지속이 이제는 포항공대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있다. 이런 사실이 한국의 이공계 지망생에게 하나의 아이콘이 된 포항공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포항공대에 애착을 갖는 모든 이에게 있어 포항공대는 과거나 현재를 바라보는 학교가 아니라 앞에 펼쳐진 나날들을 바라봐야 하는 학교이다. 이미 수년전에 제시된 포스텍 비전은 학교에 끝없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또 명확한 목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긍정할 만하다. 하지만 실천에 의구심을 자아내는 계획은 구성원에게 냉소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수많은 사회?역사의 사례들에서 목표를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리더의 존재는 필수적이며 때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탁월한 교육환경요소의 지속적인 확보와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으로의 성장, 그리고 효율적인 운영체제의 정립과 발전재원의 안정적인 확보라는 장밋빛이면서도 멋진 포스텍 비전은 대체 누가 끌어갈지 궁금하다.

의사결정의 정점이 없어도 다수의 참여보장에 의한 지극히 민주적인 의사결정방식으로 이 목표들을 달성하려고 총장부재체제를 꾸려나가는 것인지 학교와 재단측에 묻고 싶다. 또 포항공대가 그렇게도 민주적인 제도가 뿌리내린 곳이라 자부하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서는 ‘무엇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누가’, ‘누구와’ 이뤄낼 것인가도 중요하다. 작년 여름부터 학교에 붙기 시작한 ‘총장을 원하오!’라는 목소리에 대한 미미한 응답과 수많은 소문, 이제는 고등학생들도 묻기 시작한 ‘왜 포항공대에는 총장이 없는가?’라는 질문들, 정말 훌륭한 총장님이 ‘곧’ 오실 거라는 입에 발린 말들을 이제는 모두 씻어내 주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포항공대가 자부해온 수많은 장점들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볼 수 있고 또 변화를 지속시킬 의지를 가진 신임총장님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총장이 없이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포항공대 자체가 고여 버린 하나의 거대한 지곡연못이 될지도 모른다.

학교의 입장에서 졸업생 명단을 평생 갖게 되듯이 졸업생이라는 입장에서 출신학교는 내 평생을 따라다닐 수 있다. 학교가 나를 자신의 오점이 되길 바라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학교가 나의 낙인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