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논단] 저항 한 개 구하기 힘든 연구중심대학
[독자논단] 저항 한 개 구하기 힘든 연구중심대학
  • 박정웅 / 신소재 석사 02
  • 승인 2002.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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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위트 넘치는 수많은 글들 중에 자신이 운전면허증을 분실하여 재발급 받는 동안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잘못된 행정의 결과가 개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야기하는지를 꼬집은 글이 있다. 그 중 가장 압권인 부분은 에코 자신이 결국 인맥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음을 시인하는 장면으로 부적절한 행정처리가 가져오는 불편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불행히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나에게도 일어났다.

얼마 전 내가 받은 한 통의 이메일은 ‘3월 30일을 기점으로 본 대학 방침에 의거 우창전자의 위탁매장 임대차 계약이 해지됨’을 알려왔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내가 있는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기계 하나가 고장을 일으켰다. 기계를 분해하여 기판을 살펴보고 제작사에 문의하여 알아낸 고장의 원인은 과부하에 의해 타버린 저항이었다. 가지고 있던 설계 도면에 있는대로 저항 한 개 구해서 바꿔 달아 주기만 하면 해결될 간단한 문제였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방법은 간단한 것이었지만, 그 저항 한 개를 구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현재 연구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계를 수리해야 하는데 저항 한 개를 구해기 위해서 외부업체에 주문을 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종전까지 거래하던 외부 거래처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전자부품을 취급하는 업체를 찾아 헤매야 했고 일단 주문을 낸다 해도 최소한 며칠은 기계를 사용할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어 ‘연구중심대학’이란 이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문제는 결국 에코와 마찬가지로 전자과의 아는 사람을 통해 타버린 저항의 대체품을 손에 넣음으로써 해결되었지만 마음은 참담했다. 교내에서 간단한 전자부품 하나 구하기도 이렇게 힘들어질게 뻔한 상황에서 뭔가 대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들여다 본 메일에는 ‘매장 철수에 따른 이용에 불편이 발생치 않도록 고객(교수, 학생)들에게 홍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있을 뿐이었다. 불편을 방지하기 위해 전자과라면 모를까 언제 사용될 지 알 길이 없는 수 많은 부품들을 전부 구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각 연구실마다 중복되는 양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구비하지 못한 물품은 주문 후 수일 후에야 받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연구에 걸림돌이 될 것인가. 불편과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부품업체의 입주나 공용 스톡룸 설치 등 학교측의 성의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할 것이다.

안타까움은 무대책한 학교행정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남는다. 우창전자 철수 건은 3월 중순에 이미 교내회보를 통해 알려진 소식이었고 200여 개가 넘는 연구실의 학생들 중엔 저항 하나 혹은 코일 하나 같은 간단한 부품을 구매하기 위해 불편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학교측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허나 내겐 당장 불편하지 않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무관심 속에 유야무야 넘어갔던 일들이 일이 어디 이번 뿐이었을까.

자치단체나 학교측에서 주최했던 간담회에 갈 때마다 매번 참담함을 느낀다. 활발하게 논의되던 온라인 상의 문제들이 막상 대학 당국에 의해 공론화 되었을 때는 주최측보다도 적은 학생들의 참여로 흐지부지되고 마는 현실을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복학생에 대한 학점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수해야 하는 과목수는 그대로인 채 이수학점만 줄어들어 대외홍보상의 목적은 달성했을지 모르지만 당장 내게 불편하지 않았던 변화는 그대로 군대, 혹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교를 잠시 떠나있던 우리 선배, 동기들에게 피해로 돌아왔다.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내가 불편하지 않기에 내버려뒀던 변화의 대가는 학교에 없던 사람들에게로 모두 떠넘겨졌다. 주차장 문제는 또 어떠했었는가. 무관심 속에 흘러가버린 크고 작은 문제들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학생 모두가 눈을 번쩍 뜨고 자그마한 관심을 가진다면 과연 우리 학생들이 저항 하나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일 따위가 일어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