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내 얼굴에도 꽃이 핍니다"
"그곳에 가면 내 얼굴에도 꽃이 핍니다"
  • 김주영 기자
  • 승인 2005.04.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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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매주 원생들 대상 영어·수학 학습지도
개나리 노랗게 핀 봄날이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권유종 학우(신소재 박사과정)의 얼굴에도 노란 개나리가 피었다.

“주말마다 애육원에 봉사활동을 가는 이유가 뭐죠?”, “즐겁고 저에게 도움이 되니까 가는 거예요. 학교에만 있으면 참 심심한데 아이들과 같이 놀고 공부하는 게 즐거워요.”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권 학우는 포항시 환호동에 있는 선린 애육원을 향하는 버스를 탄다. 권 학우는 2001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주말마다 애육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92년 입학하여 오랫동안 학교 생활을 해 온 권 학우는 학교생활이 여러 모로 지루했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마냥 좋았던 권 학우는 애육원 방문을 취미 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학습 지도 요청을 받아 7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애육원에는 16명의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 33명, 중학생 13명, 고등학생 9명, 대학생 3명 등 총 74명의 원생이 살고 있다. 원생들은 소망의 방, 화평의 방 등 8개 방에 나뉘어져 가족처럼 생활하고 있고, 각 방마다 어머니 역할을 하는 ‘부모’가 계신다. 선린 애육원은 후생이 잘 이루어져 식질이 가정집 못지 않다. 권 학우는 “방도 우리 학교 기숙사보다 좋아요” 라며 웃었다.

권 학우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만은 않다고 토로했다. “처음 학습 지도를 맡았을 때에 3명이 함께 공부했는데, 그날 이후 스터디 시간에 전원이 모인 적이 없어요. 아무도 나오지 않아 하지 못한 적도 있죠.” 하지만 아이들이 커서 공부하고 싶을 때 기초가 튼튼하지 못해 힘들어하지 않도록 억지로라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후 2시 즈음, 애육원에 도착했다. 오늘은 원생들의 학교 선생님들을 초청해 대접하는 ‘선생님 초대의 날’. 식당에는 맛있는 뷔페식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원생들을 챙겨주는 부모님과 직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아이들이 학교에서 싸우고 오거나 좋지 않은 일을 겪으면 화가 난 부모가 직접 학교로 찾아간단다.

식사를 마치고 화평의 방에 놀러갔다. 화평의 방은 권 학우의 단골방. 아이들이 잡기 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권 학우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진해서 술래가 된다. 영일만 앞바다가 보이는 방 안에서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진실이, 희선이, 미성이 특히 경희는 권 학우를 무척 따랐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하여 보는 사람도 덩달아 즐겁다.

오후 3시, 공부하러 갈 시간이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아래 건물 공부방으로 이동하였다. 권 학우는 중학교 2학년인 재학이와 호근이, 1학년인 성지, 수연이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Where do you live?”, “I live in Pohang, Korea.”, “그렇지, 잘한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영어 수업이 참 재밌게 진행되었다.

권 학우의 수업을 더 들어보고 싶었지만 시설 선생님의 부탁으로 초등학교 4학년인 소영이, 진수, 동훈이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시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학교 진도 보다 조금 빠르게 학습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놓고 계셨다. 곱셈과 나눗셈 단원을 끝내야 한다는데 과연 내가 마스터시켜 줄 수 있을까? 3명을 한꺼번에 가르치기보다 한 명씩 가르치는 방법을 택했는데, 한 명을 가르치면 나머지 2명이 노래를 부르고 떠들어서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화를 내고 주의를 주면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떠들고. 권 학우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집요하다’거나 ‘독사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들이 적합하다고 했는데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갈 시간이다. 같은 테이블에 4살 정도의 여자 아이와 언니 뻘 되는 아이가 앉았다. 언니가 아이에게 “너는 누가 제일 좋아?” 라고 물으니 옆 테이블의 여자 아이를 가리키며 언니 얼굴에 붙은 밥풀을 떼어준다. 식당 내에 따뜻한 분위기가 흐뭇하게 흐르고 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분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사무실로 가서 사회복지과장 한은진 씨를 만나보았다. 사무실에는 원장, 국장, 과장 3명이 근무하고 있고 그 외 영양사, 간호사, 조리원, 위생원이 각각 한 명씩 있다. 생활지도원 9명 중 8명이 부모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분들은 24시간 원생들과 함께 생활한다. 부모는 아이들을 안정시키고 학습 지도를 하는 역할을 한다.

은진씨는 8~10명 아이들의 부모는 힘든 역할이지만 보살피던 아이가 안긴다거나 사랑한다는 쪽지를 전해주면 아주 기뻐한다고 했다. 한 부모는 아이가 수련회에 가서 쓴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가슴이 찡해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시설에 들어왔을 때,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사춘기 때 가출을 하거나 삐뚤어지는 경우가 있다. 아이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면 주위 원생들의 교육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시설에서 추방된다. 때문에 부모들은 중·고등학생들에게 각별히 마음을 쓴다. 또 안정된 생활로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시설병이 부모들에게도 찾아오기 때문에 꼼꼼한 학습 지도 등 열정을 가지고 일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어른에 대한 신뢰감을 주기 위해 부모들이 한 방에서 보통 3~5년 이상 머무르도록 한다. 봉사 활동도 지속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좋다며 매주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권 학우를 칭찬했다.

화평의 방으로 갔다. 권 학우는 방에서 고등학교 1학년인 보람이에게 중국어를 가르쳤고, 나는 다른 식구들과 거실에서 TV를 시청했다. 깨끗하게 샤워를 한 아이들 틈에 섞여 내 마음도 푸릇푸릇하다. 권 학우는 9시까지 학습 지도를 하고 식구들과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11시쯤 학교로 돌아올 예정이다.

이렇게 권 학우의 보람찬 토요일이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