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7대 총선과 정치사회학
[기고] 17대 총선과 정치사회학
  • 김광수 / 대신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 승인 2004.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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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엘리트의 순환과 국민의 선택
선거의 ‘철’이다. 이 철에 시중에 드러나고 있는 정치인들의 언행을 보고 있으면, 그들 모두 나름대로 이 시대의 고행자이거나, 이 정국의 피해자 임을 자처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 수십 혹은 수백억의 자금을 운용하던 정치인들이 천막 속으로 거처를 옮기고, 저작거리에서 무릎 꿇고 절하며, 험난한 고행의 길을 가는 수난자의 모습으로 외양들을 고치고 있는 모습은 이제쯤 우리 주변의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 험난한 고행의 길을 나서는 이들은 왜 이리도 넘쳐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철 따라 주기적으로 정치인들의 처절하기까지 한 변신에 현혹되는 것일까?

오늘 우리는 대통령 탄핵을 실행한 야당들과 이를 지지하며 안정을 희구하는 사회구성원 집단을 한 편으로 하고, 이 탄핵의 동반 희생자로 간주되는 여당과 탄핵에 공분하며 정치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구성원 집단을 또 다른 한 편으로 하던 두 편 간의 갈등 구도가 다시 움직이고 있음을 바라보고 있다. 이 두 편을 중심으로 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국민의 공분으로 인해 정치적 생명 연장에 위협을 느낀 야당 내 온건 세력과 함께 차마 탄핵은 반대하나 여당 지지 편에 설 수 없었던 온건한 보수 집단의 점진적 결집이 그 한 움직임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돌발적인 정치적 사건 앞에서 정치적 견해를 가지기 힘들었던 다수 대중의 무정형적 분산이 또 다른 움직임이 되어 이 정국의 방향을 틀어 가고 있다.

정치적 이해와 직결된 정당이나 이해 단체들은 이 움직임 속에서 조차 ‘현상유지’와 ‘변화지향’이라는 대립의 한 편에 서서, 이 움직임의 방향에 예민하다. 왜냐하면, 이 움직임이 다가오는 총선에서 그 편가르기의 승패를 결정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매체가 그 움직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에서, 정치세력들은 어느 편들기 없는 객관적 보도를 소리치지만, 현실적으로 그 ‘객관적’이라는 말도 내 편 거들기 일 때, 보다 쉽게 용인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정치적 참여에서 한 표 분량의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한 편만을 거들어 줄 것을 요청 받고 있는 셈이니, 개인은 뚜렷한 정치적 편들기를 수행하는 것이 사회적 의무에 속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같은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 한 사회과학자가 편들기 없이 이 정국과 선거의 의미를 설명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한 방법론에 기대어, 정치세력들의 본질에 대한 싸잡기로서 이 설명의 의무를 대신해 볼까 한다.

정치적 사회현상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사회과학의 분야는 ‘정치사회학’ 이다. L. A. Coser는 일정한 정치적 현상을 빙산에 비유하여, “수면 위에 드러난 부분을 순수한 의미에서의 정치학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 바다 밑에 잠겨 있는 부분과 그 바다까지도 총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정치사회학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탄핵정국을 이 비유에 대입하면, 탄핵 정국이라는 정치적 사건은 수면 위에 떠있는 빙산의 한 부분으로서 정치학의 주된 대상 이겠으나, 정치사회학은 잠겨 있는 빙산 전체와 그 빙산을 만들어 낸 바다까지도 고찰하는 것과 같이 이 정국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러한 정치적 현상을 노출시키게 된 총체적인 사회구조적 원인들을 밝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구조의 전반적 윤곽을 그려낼 재간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사건을 넘어 서서 드러나는 일련의 정치세력 간의 갈등을 배태해 내고 있는 우리 정치권의 구조적 구성의 일면이나마 ‘엘리트의 순환’의 논리를 빌어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의 순환 속에서도 민주적 제도의 작동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역할 하는 국민의 정치참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논의해 볼 것이다.

Vilfredo Pareto에 의해 제시된 엘리트의 순환론은 ‘누가 사회를 지배하며, 그 지배는 어떻게 지속 혹은 단절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다. 그가 대중과 구별되는 엘리트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두 비합리적인 심리적 경향성 (잔기 residues), 즉 ‘조합의 본능’과 ‘집합체 지속’이라는 개념은 권력 경쟁의 진행, 특히 우리의 정치권 내의 동학과 선거정국에서 나타나는 정치엘리트의 행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조합의 본능이란, 상황을 교묘하게 조합하여 새로운 가치나 이념, 현실을 창출해 내는 비합리적인 심리적 특성을 의미하며, 집합체 지속이란, 사회구조의 근간을 유지하는 비합리적인 안정과 통합의 특성을 의미한다. 전자의 속성을 지닌 엘리트는 지적이며 교활한 ‘여우’에 비유되며, 후자의 속성을 지닌 엘리트는 폭력적이며, 무감각한 ‘사자’에 비유된다. 이러한 엘리트의 상이한 심리적 경향성이 대중적 지지를 통해 지배구조 내에서 주도적 점유의 연속과 단절로 이어져 가는 현상을 ‘엘리트의 순환’으로 보았다.

특정 시대의 엘리트란, 이 두 경향성의 한 편에 기울어져 있다. 안정된 사회에서 엘리트는 대체로 조합의 본능 경향을 보이는 데, 이 여우형 엘리트는 대중을 자기 의도대로 이끌기 위해 이념을 고안하고 정치적 위기에 설득으로 대처하며 자기들의 이해를 관철시켜간다. 이는 권모술수로 드러나고 정치적 부패로 귀착하며, 이에 집합체 지속의 경향이 강한 사자형 엘리트가 폭력적 수단과 대중에 내재한 집합체 지속 경향에 호소하여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폭력 만으로 지배가 어렵게 될 때, 설득과 술책의 동원이 필요하게 되며 사자형 엘리트는 스스로 여우형 엘리트로 변신하거나 조합의 본능 경향을 지닌 대중을 엘리트 집단 내에 유입한다. 조합의 본능이 상승하고 집합체 지속의 경향이 쇠퇴하면서 엘리트는 다시 현실에 안주하면서 권모술수로 정치적 부패가 만연함으로써 폭력적 사자형 엘리트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엘리트의 순환과정을 보인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경향성을 지닌 정치엘리트가 존재하고 있는가? 1980년대 이후 우리 정치권은 설득과 가치생산을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켜 왔다는 점에서 사자형 엘리트가 여우형 엘리트로 변신했거나, 조합의 본능 경향을 가진 대중을 유입해 온 과정을 거쳐 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의 엘리트 간의 충돌은 변신 여우형과 유입 여우형 간의 충돌의 성격을 띠면서, 부패해가고 있는 여우형 엘리트 주도의 정국에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유입 여우형이 변신 여우형을 몰아내려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변신 여우형의 거센 반발도 함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엘리트 순환의 형태 확인이 아니라, ‘엘리트의 순환’ 논리에서 선악을 기준으로 정치권을 편가르고 있는 우리의 관행이 간과해 왔던 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어느 시기에서는 정국의 피해자도 있을 것이며,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이기적 본성을 상대적으로 자제해 온 정치인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Pareto가 제시했듯이, 엘리트의 비합리적인 심리적 경향성이란 그 지배수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기 이익추구에 유용한 능력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Lord Acton의 경고와 맥락을 같이 한다. 오늘 부패한 엘리트 집단을 몰아내려는 또 다른 엘리트 집단은 시간의 경과 속에 그 지배의 지속을 위해 변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간사회의 본래적 한계를 인정한다면, 몰려나가는 엘리트 집단과 몰아내려는 엘리트 집단은 그 순환의 고리와 함께 권력부패의 고리도 공유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엘리트의 순환 속에 출몰하는 권력 부패의 본성적 원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그 극복의 임무는 Pareto가 신뢰할 수 없고 무능하다고 했던 대중 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러한 대중의 몫에 사활을 건 정치체제를 우리는 ‘민주주의’라 일컫는 것이다. 대중의 감시와 참여 없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라 불려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국가들은 일상적 정책결정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직접적 참여가 불가능한 현실 때문에 그 대안으로서 간접적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사회구성원의 정치참여를 주기적으로 보장해 주는 선거제도를 통하여 그 대표자를 선출하는데 핵심이 있다. 그러나, 이 주기의 간격이 긴 탓에 그 보완책으로서 상시적인 참여를 위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다. 이는 주기적인 선거행위를 통한 정치참여의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원칙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의제의 명분으로, 국민의 일상적인 정치적 표현 행위를 사회의 위협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의제가 지닌 본질적 의미를 비켜간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우리는 정치엘리트의 선택을 통하여, 엘리트 순환의 고리를 이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그들의 정쟁을 지켜보다가 또 그 선택의 철을 기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주체자인 국민의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오늘도 선거의 ‘철’에 나선 많은 정치엘리트 후보들은 겸손한 웃음을 머금고 벽보사진에 등장하거나, 거리에서 우리에게 몸 낮춘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국민을 위하겠다는 표어와 논리 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철 마다 보이는 그들의 겸손에 현혹되지 말고, 이 철이 지나면, 대의제의 명분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기를 당연히 여기는 이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선거의 철에 우리의 권리를 위임해 줄 정치엘리트 선택에 고심해야 하며, 그 귀한 권리를 행사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선택한 민주주의 제도는 선거 철이 아닐 때에도 정치엘리트가 아니라, 국민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