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제 17대 총선의 의미와 유권자의 과제]
[시론 - 제 17대 총선의 의미와 유권자의 과제]
  • 김영배 / 한겨레 신문 기자 <사진 제공 - 오마이 뉴스
  • 승인 2004.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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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과 ‘껍데기’를 깨뜨리는 적극적 실천 필요한 때
57.2%. 이제는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진 지난 2000년 4월 16대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율은총선 사상 최저 기록이었다. 15대 총선 투표율 63.9%보다 6.7%포인트, 초대~15대 총선 평균 투표율 77.1%에 견줘선 무려 19.9%나 떨어진 수준이었다. 아울러 지방선거를 빼고는 첫 50%대 투표율이란 기록도 세웠다.

이는 물론 20, 30대 젊은 유권자들의 선거 불참이 많았던 데서 비롯된바 컸다. 젊은 유권자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서울(54.3%) 부산(55.4%) 대구(53.5%) 경기(54.9%) 등 대도시와 수도권의 투표율이 평균을 밑돌았던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정치 무관심층의 증가로 투표율은 앞으로 추세적으로 더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지난해부터 줄줄이 터져 나온정치인 비리사건, 불법 대선자금 사태로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와 불신이 극도로 깊어진 사정이 이런 관측에힘을 보태고 있다.

최저 투표율 기록 이번에도 이어지나
투표율 하락은 세계적 추세고, 선진국의 투표율은 우리보다 더 낮다는 심드렁한 분석도 있긴 하다. 투표를 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는 불참 유권자들의 항변을 아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투표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느냐는 ‘허무주의’와, 후보나 당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오십 보 백 보론’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투표율 하락은 이제, 거스르기 힘든 흐름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선거는 기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문제가 ‘투표를 하지 않을 권리’는 있어도후보를 뽑지 않을 도리’는 없다는 점이다. 최선의 후보가 없어 투표장에 나가지 않은 행동이 차선(또는 차악) 후보는 나가떨어지고 최악의 후보가 당선되는 뜻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게 선거 불참의 비극이다.

투표장으로 가려는 유권자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모처럼 맞은 휴일의 달콤한 늦잠과 나들이 유혹만은 아닐 것 같다. 3천만 명을 웃도는 유권자 중 1명이라는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비롯된 허탈함만도 아닐 것이다. 늦잠과 나들이의 유혹을 떨치고, 3천만분의 1표에서 비롯되는 ‘물방울 효과’를 체득했더라도 또다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게 해서 뽑은 국회의원이 도무지 무슨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273명 중 1명에 지나지 않는 지역구 의원은 하찮게 보이기까지 한다.

정치부로 배치돼 국회를 맡아 출입하다보면, 입법을 맡는 의원들의 구실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밖에 없다. 그 힘의 실체라는 것은 대단히 씁쓸하게도 ‘뭘 할 수 있는’ 힘이라기보다 ‘뭘 못하게 할 수 있는’ 힘이었다. 시쳇말로 ‘내가 너 잘되게 해줄 능력은 없어도 못되도록 훼방 놓을 수는 있다’는, ‘네거티브 파워(?)’랄까.

가장 최근의 극명한 예로 ‘일제 강점 하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안’이 처리되는 과정을 들 수 있겠다. 이 법안은 ‘독립군의 딸’ 김희선 열린우리당 의원이 발의한 것으로, 대통령 직속에 별도 위원회를 두어 반민족적인 친일 행적을 밝혀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역사의 과오에 대한 반성과 맞닿아 ‘제2의 반민특위법’이라고 불리어진 이 법안 발의 때 서명한 의원은 무려 155명으로 과반수를 훌쩍 넘었다. 여기에는 한나라당 소속 의원 50명 안팎도 포함돼 있다. 여론의 절대적 지지 분위기까지 감안할 때 국회 처리 때 별 어려움을 겪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 이 법안은 과거사진상특위에서 법사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홍역을 치렀다. 그 나마 내용은 애초 안에서 크게 변질된 채였다.

반민족 특별법’마저도 수모 받아야 하는 이유
그 불가사의한 배경에는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기득층 눈치보기와, 조상의 허물이 드러날 것을 꺼려하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몇몇 의원의 교묘한 방해가 숨어있었다. 국회 과거사진상특위에서 의결한 이 법안을 넘겨받은 법사위 심의 단계에서 몇몇 의원은 처벌 조항도 없는 이 법안을 두고 “너무 징벌적”이라는 가당치않은 이유를 대며 차일피일 시일을 끌다가 법사위로 반려해 특위에서 재의결하는 소동을 거쳐야 했다. 김용균 한나라당 의원 등은 법사위 소위에서 월권시비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각 조항을 뜯어고쳐놓고도 수정안에 대해 또 다시 태연자약하게 딴지를 걸어 지켜보는 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뜻있는 의원 몇 사람이 도모하는 새로운 일을 반대 진영의 몇 의원이 그것을 쉽사리 좌절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예다. 각 상임위(또는 특위)를 통과하고,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에 회부 절차를 거쳐야할 뿐 아니라 각 단계에서 합의를 원칙으로 삼는 국회 일처리의 과정의 특성 때문에 이런 애로는 앞으로도 불가피해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최악의 후보를 낙선시키는 선택(결국 투표장으로 가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이 최선의 후보를 뽑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한 달 남짓 남은 17대 총선은 우리 정치사에서 ‘3김 시대의 실질적 종말’을 고하는 변곡점의 의미를 띨 것으로 정치학자들은 보고 있다.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현대 정치사를 떡처럼 주물러온 ‘3김’이 사실상 모두 퇴장한 뒤 치러지는 첫 총선이라는 점에서 선거 결과는 정치 의식 변화의 잣대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3김 시대’에는 3김의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따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역주의 선거 행태가 이뤄졌는데, 이번 총선에선 그 같은 지역주의가 크게 약화됐는지 또는 구조화돼 좀 더 오래 갈 것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강 교수는 “그와 연관해 지역을 대신해 나타나는 이념적 차이, 정책적 차별성에 따라 투표가 이뤄지는 싹을 볼 수도 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되짚어 말하면, 지역주의 행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유권자들의 참여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구태에 젖은 습관적 지역주의 행태는 그대로 존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나아가 각 정당들이 선거 뒤에도 지역주의 구태를 벗어나 정책경쟁을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불행으로 이어진다.

선거에 큰 변화 불러올 1인 2표제
각 후보나 정당 사이의 차이를 그다지 느끼기 어렵다는 푸념이 있을 수 있겠는데, 이번 총선부터는 후보 뿐 아니라 정당에게도 표를 던지는 ‘1인2표제’가 시행돼 선거환경은 크게 바뀐다. 진보 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젊은 유권자들에게는 ‘떨어질 게 뻔한 후보에게 던져지는’ 사표의 허탈함을 많이 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거둔 득표율은 각각 38.96%, 35.87%인데 반해 의석 차지율은 이보다 훨씬 높은 48.72%(133석=지역구 122+비례대표 21), 42.12%(115석=96+19)였다. 이 비율대로라면 전체적으로 1.18%의 득표율을 올린 민주노동당은 최소 3석은 건질 수 있어야했음에도 단 1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소선거구제여서 지역구를 승자 독식으로 결정하는데다 비례대표는 지역구 의석에 따라 갈라먹도록 돼 있는 탓이다. 민노당이 출마 후보를 냈던 지역만 대상으로 할 경우 무려 13.1%의 득표율을 올렸다는 점에서 억울함은 더욱 커진다.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률이 결정되는 게 마땅한 선거제도의 기본 취지에서 한참 벗어나는 이런 어이없는 결과가 1인2표제 아래에선 상당 부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바뀌는 선거법에서 비례대표 의석 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아 일정한 한계는 있겠지만, 유권자들의 사표 심리를 줄이고 선거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역사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민노당이 창당 뒤 처음으로 원내 진출을 기정사실로 굳히고 있을 뿐 아니라 15석 확보라는 야무진 꿈을 밝히고 있는 것 또한 여기에 힘입고 있다. 젊은 유권자들이 적어도 ‘뭐, 찍어봐야 되지도 않을 텐데…’라는 것을 선거불참 사유로 들 일은 줄어드는 셈이다. 이는 민노당 지지자가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앙선관위는 여기에 각 정당의 정책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총선을 앞둔 3월에 가동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주요 현안에 대한 각 정당의 견해 및 공약을 일목요연하게 비교 분석한 결과를 선관위 홈페이지에 올려 유권자들의 선택을 돕고, 선거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자리 창출 등 유권자들이 궁금해 하는 현안에 대해 한나라당·민주당·열린우리당·자민련·민주노동당 등 각 당이 어떤 방안을 갖고 있는지 직접 질문을 던져 얻은 답변과 각종 공약 및 정책에서 추출한 견해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 제공한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또 17대 총선에 출마하는 입후보자들의 세금 체납 여부, 전과 및 병역 기록 등 신상자료를 유권자 가정에 우편으로 발송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선관위는 후보자들의 신상자료를 인터넷에 올려놓거나 각 지역 선관위사무실에 배치하는데 머물러 유권자들이 후보의 신상 정보에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왔던 것이 크게 개선되는 셈이다.

시민단체들도 각 정당의 정책을 평가해 순위를 매길 방침이어서 유권자들이 선택의 잣대로 삼을 만한 재료는 예전보다 훨씬 풍성해지고 있다. 낙천·낙선 운동 또한 일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총선에 나서는 후보들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수고만 기울이면 각 후보자와 정당에 대한 갖가지 정보와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회 어느 한쪽에선 지금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 투표율 하락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젊은 층의 정치 무관심이 확산돼 17대 총선 투표율이 또다시 최저 기록을 나타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다. 그 절박한 기대를 깨뜨릴 수 있는 길은 젊은 유권자들이 나서 ‘꼭 찍고, 잘 찍는’ 것 말고는 별로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