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회과학의 미국 편향성은 극복가능한가
[기고] 사회과학의 미국 편향성은 극복가능한가
  • 노진철 /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 승인 2003.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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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현실에 적합한 학문적 과제 제시가 학자의 기본 소명
우리나라의 대학에는 알다가도 모를 묘한 지적 풍토가 있다. 서구 대학의 학위자와 국내 대학의 학위자 간에 학문적 능력에서 현저한 격차가 있다는 인식이다. 자연과학이나 공학 분야에서는 동ㆍ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초월한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을 전제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과학을 먼저 발전시킨 서양에서 공부하는 것이 국내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다양한 전문지식을 접할 기회가 많을 터라, 서구에서 받은 학위를 우대할 수도 있겠다 싶다.

미국출신 박사들에 의한 사회대학 지배

그러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지식의 문화적 차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서구의 경우 영국에서 공부한 학자가 불란서에서 학문 활동을 해도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는 판이다. 하물며 동양과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서구에서 공부한 학자가 한국에서 학문 활동을 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그가 한국인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지식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가 학문적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지식인 사회, 특히 대학을 독점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소위 일류대학일수록 심하다. 일부 삼류 사립대학들이 입시철에 자신의 대학에 외국 박사학위 소지자가 많다는 것을 광고로 내보내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학의 서구지향성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만하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이것은 우리나라의 사회과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 편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전쟁 이후 대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기지촌 지식인’들이 70년대를 전후하여 귀국하여 대부분의 대학에 터를 잡으면서 학문의 객관성을 미국식 실증주의와 동의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지식의 객관성이란 지식 수용의 방법론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문화와 역사를 도외시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 미국출신 지식인들은 실증가능성 혹은 검증가능성을 학문 일반의 가치기준으로 신봉한 나머지 학문적 정체성을 상실한, 탈문화적-몰역사적인 지식풍토를 만들어낸 것이다.

미국 편향성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어

이러한 경향이 앞으로도 더 강화될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003년 현재 학술진흥재단에 등록된 외국박사 학위자의 국가별 분포를 보면, 사회학의 경우 미국이 53%, 독일이 12%,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5.5%를 차지하고 있고, 정치학의 경우에도 미국 56%, 독일 9%,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7%를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대학의 지적 풍토에서는 지속적으로 미국 출신의 대학교수들이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전체 외국박사를 보아도 미국이 57%이고, 독일이 8%, 프랑스 5%, 영국 3.5%로서 위의 두 사회과학 영역과 유사한 분포를 보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회과학 분야 전반이 앞으로도 미국에 강하게 편향된 채 탈문화적-몰역사적인 지식을 양산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대학교수의 신규 채용과정에서부터 미국과 유럽 간에는 현격한 차별이 존재한다. 이미 대학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출신의 대학교수들은 미국 대학의 박사학위 소지자는 세밀한 전공분야별로 가능한 많이 확보하려고 하는 반면에, 독일, 불란서, 영국 등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은 전공분야에 관계없이, 또 국가에 관계없이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대체로 우리나라 대학의 박사학위 소지자를 무조건 실력이 열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은 미국에서 공부한 자기를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에 열악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삶과 앎의 분리

최근 우리 사회과학계에는 삶과 앎, 즉 삶의 현실과 과학적 지식이 따로 논다는 각성이 일고 있다. 왜 이렇게 삶과 앎이 분리된 것일까? 이것은 전통사회가 부재한 미국에서 미국식 사고방식을 배운 대학교수들이 우리 사회를 ‘근대화’, ‘현대사회’라는 미명하에 미국사회와 동일한 사회로 간주하고 서구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데 몰두해왔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사실은 독일, 불란서, 영국 등 유럽 출신의 사회과학자들이 문화와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미국 출신의 사회과학자들은 대부분 탈문화적-몰역사적인 분석을 선호하는 경향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서구와 다른 역사적 발전과정을 밟아왔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 양식과 사고의 틀이 서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 사회현상을 서구의 사회이론으로 검증하는 각종 조사연구를 수행해 왔다. 그들은 유럽출신의 사회과학자들이 대체로 탈문화적이고 몰역사적인 실증주의적 조사연구방법을 무시하는 것과는 달리 계량적 분석을 과학적 객관성을 담보하는 사회과학의 정수로 여겼다. 그런 탓으로 사회과학 계열의 학회 발표장은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분리된 각종 도표와 수치로 뒤덮이고, 학회지는 이들 계량적 분석으로 넘쳐난다. 학문적 논쟁이라고 해봐야 어떤 조사방법이 더 적합한지, 어떤 통계분석이 오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를 놓고 언성을 높이는 것이 고작이다. 그들의 이론적 관심이란 것도 오로지 어떤 사회이론이 우리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합 또는 부적합한지를 판정하는 데 모아진다.

미국 편향성은 어떻게 극복 가능한가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그들처럼 우리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이론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괄호치기하고 그저 서구이론의 검증에만 매달려가지고는 설문과정과 통계처리 과정에서 이론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현실과 한국의 현실을 혼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며, 나아가 미국의 현실을 표준으로 간주해 한국사회 현실을 평가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터지지도 않은 사회문제를 미국이론에 기초한 가설을 세워 분석하고는 미국의 현 제도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는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일정한 형식의 학술논문만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우선 서론과 본론, 결론이 뚜렷이 구분되어야 하고, 서론에는 문제제기, 연구목적, 연구범위, 연구방법, 선행연구조사가 들어가야 하고(여기에 가설설정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리고 본론에서 서구이론의 소개와 설문조사의 결과, 복잡한 통계처리가 이루어지고, 끝으로 결론과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정체된 사회, 덜 진보한 사회, 왜곡된 근대화로 비판되고, 미국사회의 현 제도가 대안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사회과학의 미국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이 우리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이론의 창출에 모아져야 한다. 문제의 제기는 우리 사회의 전통과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다른 문화권에서도 근본적인 문제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창의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적합한 조사연구 방법을 개발해내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대학교수의 채용이나 업적의 평가에서 양적인 평가보다는 질적인 평가에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과학자들은 미국 편향적인 이데올로기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 그런 과학적 전제들을 탈피하여 우리 사회 현실에 적합한 학문적 과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노진철 박사는 독일 빌레펠트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환경과 사회: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체계들의 적응>, <현대 환경문제의 재인식>등이 있으며, 주요 관심 영역은 사회학이론/방법론, 환경사회학, 정보사회학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