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과학기술이 홀대되는 사회
[시론] 과학기술이 홀대되는 사회
  • 최연구 / 한국과학문화재단 전문위원
  • 승인 2002.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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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구조 부추기는 사회풍토 바로잡아야

시대마다 사회마다, 생산수단이나 물질적 기초와 관련된 경제적 또는 기술적 특징이 있다. 그래서 돌도끼나 돌화살을 만들어 쓰던 시대를 우리는 석기시대라고 부르고, 청동기를 도구로 쓰던 시대를 청동기시대라 한다. 산업혁명으로 기계공업이 핵심이 되는 시대는 산업사회라 하고, 인터넷이나 휴대폰 등 정보통신기술이 두드러진 사회는 정보사회라고 부른다. 요즘의 사회를 부르는 명칭으로는 정보사회, 지식사회, 지식기반사회, 후기산업사회 등 다양한 명칭들이 있다. 그런데 좀 더 포괄적으로 보면, 오늘날의 사회는 첨단과학기술이 우리의 삶의 변화시키고 사회변화를 촉진시키는 사회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사회를 과학기술사회 또는 과학기술시대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사회의 중점산업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IT니 BT니 6T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6T란 다름아니라, IT(정보공학), BT(생명공학), NT(나노테크놀로지), ET(환경공학), ST(우주공학), CT(문화콘텐츠기술) 등 과학기술사회의 첨단산업을 일컫는 말이다. 때문에 어떤 논객은 오늘날은 ‘T-브라더스’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6T산업은 최첨단 기술력과 고급연구인력이 투입되어야하고 국가적 차원의 연구개발투자가 집중되어야하는 분야들이다. 우리 정부도 지난 2001년 12월 미래를 이끌 첨단과학분야 6가지를 6T산업으로 선정, 발표했었다. 이중 CT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예외없이 기초과학과 첨단공학에 의해 주도되는 전략산업들이다.

이들 산업은 그야말로 향후 국가경쟁력을 가늠짓게 될 기간산업이며 국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미래산업이다. 이공계 우수인력들이 조직적으로 육성, 투입되지 않는다면 6T산업의 미래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공계 우수인력이란 다름아니라 수학자, 물리학자를 비롯한 과학자, 그리고 산업현장의 엔지니어들이다. 그런데 요즘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공계 기피현상의 심각성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있다. 첨단산업이 지배하는 과학기술시대에 이공계 기피현상이라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진학 기피대상 1순위로 전락한 이공계

불과 80년대만 해도 공과대학은 취직도 잘 되고 전망도 밝아 학생들이 몰렸었다. 가령, 80년대 중반경 전자공학과나 물리학과는 이과에서 최고 인기학과였고, 우수한 학생들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나 물리학과를 목표로 해서 밤새워 공부했었다. 그 당시 이공대를 졸업한 우수한 인력은 산업계로, 연구계로 진출해, 오늘날 대덕단지의 첨단연구소, 삼성전자반도체 또는 벤처기업의 핵심인력으로 일하고 있다. 반도체 최강국, 초고속인터넷 세계1위, 원자력강대국을 건설해온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이공계의 우수한 인력이었다. 그런데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 사회는 급변했고, 이공계대학은 진학 기피대상 우선 순위로 지목되고 있다. 이제 이공계기피는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러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일전에 어디선가 들은 바로는, 과학고의 경우 1등에서 100등까지의 상위권학생들의 희망학과는 하나같이 의대라고 한다. 우수과학인력 양성을 위해 만든 특수목적고등학교인 과학고의 학생들이 과학을 기피하고 의학을 선호한다는 것은 결코 그냥 듣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나 한의대로 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의사나 한의사가 돈을 잘 벌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성공이 쉽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의사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의사면 다 의사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의대내에서도 전공 선택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인턴, 레지던트를 거치면서 의대에서 1,2등 하는 예비전문의가 선택하는 전공은 바로 성형외과이다. 그 다음이 정형외과, 흉부외과 이런 식이고 소아과나 산부인과는 가장 비인기학과라고 한다. 이것도 심각한 현상이다.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나 새생명을 다루는 의사보다, 아픈 환자가 아닌 ‘고객’을 상대하는 의사가 더 인기있는 현실은 어쩐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결국 그 이유는 성형외과가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사회의 모든 것은 돈으로 귀결되고 만다. 인기직종이란 결국 연봉이 많은 직종이고, 먹고살기가 힘든 직종은 비인기직종이 되는 것이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시기에 공학박사를 우대했던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이공계가 반짝 인기를 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봐도 공학박사나 엔지니어, 과학자보다는 변호사, 의사가 더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학생들은 의대, 법대를 선호하게 된다. 이공계 기피현상은 배금주의가 만연해 있는 우리사회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소비산업, 서비스 산업에 해당하는 변호사, 의사들이 경제적, 사회적 특권를 누리고 있고, 경제발전과 사회의 물질적 성장을 담당하는 생산자인 공학자, 과학자는 상대적으로 홀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소득 만 불도 채 되지 않는 시점에서 변호사, 의사가 특권을 누리고 이공계기피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 징후이다.
한국경제는 산업화가 제대로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소위 신경제, 벤처붐이 일어 경제거품만 커졌고 그러다가 IMF를 맞았다. 미성숙한 대량생산사회에서 그 물질적 기반도 취약한 상태에서 이공계기피현상이 이렇게 심각하다면 우리사회는 선진사회로 도약할 가능성조차 없다.

과학기술없이 국가정책력을 어떻게 키우나

과학기술 없이는 국가안보도, 국가경쟁력도, 세계화도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의 주역들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홀대하고 ‘무식한 공돌이들’이라고 폄하하기까지 한다. 당장 우리가 매일 보는 일간지만 보더라도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 연예란은 있어도 과학란은 아예 없다. 과학기술 관련기사가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경우는 생각할 수 조차 없다. 물론 문화적 경쟁력도 중요하고 스포츠, 레저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는 물질적 토대이다. 국가의 물질적 토대를 좌우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과학기술이다. 미국이 인터넷으로 세계정보통신을 주도하고, 첨단 군사무기로 세계를 압도하고, 엄청난 경제력으로 세계최강대국으로 군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앞선 첨단 과학기술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물질적 토대, 즉 경제력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과학기술은 도외시한 채 고부가가치의 서비스산업만 팽창한다면, 그 사회는 하체는 부실한데 머리만 비대해지는 기형적인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우수한 인력들이 모두 변호사, 의사가 되고 이공계에 고급두뇌들이 가지 않는다면 10년 후, 20년 후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과학자, 엔지니어가 홀대되는 과학기술사회의 미래가 어떠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