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월드컵과 노사관계
[시론] 월드컵과 노사관계
  • 하승립 / 한국노동혁신연구소 동향분석팀장
  • 승인 2002.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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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자유노련(ICFTU)은 월드컵 개막에 맞춰 한국 노동탄압 중단을 위한 국제캠페인 돌입을 선언하면서 만든 포스터를 국제자유노련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온나라가 붉은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항도 부산의 아시아드 경기장을 정점으로 해운대 바닷가에서 부산역의 드넓은 광장까지, 그리고 광화문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서부터 대학로까지, 술집 대형텔레비전 앞이거나 내 집 안방을 막론하고. 붉은 옷을 입은 군중들이 차도를 막고 버스 위에 올라 고함을 내질러도, 아파트에서 발을 동동 굴러도 누구하나 제지하지 않는다.

지난 48년간 풀지못한 숙제를 풀어낸 축구 국가대표팀은 어느새 한국민들의 희망이 되어 있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상 초유의 경제대란을 겪으면서, 늘상 싸움박질이라는 '규칙적이고 일관된' 행동양태를 보이는 정치권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국민들에게 축구 대표팀의 이번 월드컵에서의 선전은 한줄기 단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어도 월드컵 기간 동안 한반도는 '한 사람의 열외도 없이' 붉은 악마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거기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넘어 '배신자'라는 눈총을 받게되는 것이다.

'배신자'의 자리에 있는 그들

그런데 지금 그 이방인 내지 배신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노총이 지난 5월말부터 시작한 파업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병원과 택시, 제조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한 이 파업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노사분규 없는 월드컵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노동계도 월드컵 개막 전에 파업을 끝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지만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이들 파업 노동자들은 월드컵에 묻혀 주목조차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설령 파업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월드컵 기간 중에 웬 파업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논리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월드컵 기간에 정쟁을 중단하고 노사분규도 중단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사회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전제주의적 단면이다. 이 논리를 극단적으로 이끌어보면, 월드컵이라는 중차대한 국가행사를 치를 때는 모든 사람들이 월드컵 성공개최에만 힘써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국민들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버린 '홍삼 트리오'의 각종 게이트에 대한 수사도 국론분열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 중단하고, 대표적인 대립과 갈등의 주범인 지방선거도 연기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앞선 월드컵 대회였던 98년 프랑스 대회 직전 국적 항공사인 에어프랑스의 파업 논란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월드컵을 앞두고 항공사가 파업하겠다는 것에 대해 일부 우려의 목소리는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을 지지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 중의 하나인 '똘레랑스'인 셈이다.

흔히 한국의 남자들이 가장 즐겨하는 얘기가 군대와 축구 얘기라고들 한다. 국내 리그의 팬들은 많지 않지만 국가대표 경기만큼은 기를 쓰고 감독이 되고 해설자가 되는 것이 한국인들의 기질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노동자들도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훨씬 강한 집착을 보인다.

특히 생산직 노동자들의 경우 많은 이들이 조기축구회 등에서 직접 공을 차는 사람들이다. 일전에 노동계에서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에 출전할 선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축구대회를 연 적이 있다. 이때 노동자들의 관심과 호응은 대단했다. 각 공장별로 지역예선이 열리기 몇 달전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경기 중에는 그 열정이 넘쳐 충돌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노동자들도 누구보다 월드컵을 즐기고 싶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도 똑같이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집안에서 공장에서 거리에서 경기장에서 한국 대표팀의 선전을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노동계의 선택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현실이다. 이상적 이론과 실제 현실 사이에는 큰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이 동시에 월드컵을 개최하기 때문에 양국이 힘을 합쳐 훌륭한 월드컵을 치러내야 한다고 말들을 한다. 그리고 한일 양국 대표팀이 모두 좋은 플레이를 펼쳐 16강에 함께 진출하자고도 한다. 이것이 이론이다.

그러나 이 땅의 국민들 누구에게라도 물어보라. 만약 일본은 16강에 진출하고 한국은 탈락한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반 진출을 하거나 차라리 동반 탈락을 하거나, 아니 솔직히는 한국은 올라가고 일본은 떨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가 월드컵 기간에 파업을 진행하기로 한 것은 '얻는 것없이 욕 먹을'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전면적인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판단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월드컵 기간에 노동계가 양보한다는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같은 노사간의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87년 이전 성장 우선주의 아래의 억압적 노사관계가 사회 민주화 바람 속에 폭발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립적 노사관계가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업종별 노사협의의 대안 가능성

그렇다면 정녕 대안은 없는 것일까. 의외로 쉽게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월드컵 개막 전에 민주노총이 밝힌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민주노총은 "업종 단위의 노사협의를 보장하면 파업을 유보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업종별 노사협의 테이블이란 철강이면 철강, 자동차면 자동차 등 각 업종 단위로 노사가 협상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현재 국내에서는 최초로 주5일 근무제 합의를 이끌어낸 금융을 비롯, 택시, 버스 등 극히 일부에서만 업종단위의 논의 테이블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전체 업종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업종별 테이블이 마련될 경우 다양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우선 업종별로 노사가 그 산업이나 업종에 대한 이해와 상호신뢰를 만들어갈 수 있다. 지금의 산업은 국내경쟁이라기 보다는 전세계적인 흐름을 타는 경우가 많다. 철강의 예를 들면 국제적 공급과잉 속에 미국에서 세이프가드를 발동하는 등 보호무역의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철강 노사가 간담회를 가진 후 철강노조들이 미국 철강노조에 한국측 입장을 전달하겠다고 나선 것은 산업 업종 단위 노사협의 테이블의 힘을 보여준 좋은 예다.

노동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심각한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현재 전체 임금 노동자의 53%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진 비정규직이 이처럼 확산되고 있는 것은 정규 노동자에 비해 임금이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단순한 임금 뿐만 아니라 각종 복지혜택 등을 감안하면 비정규직의 확산을 더욱 부채질할 전망이다. 하지만 산업 업종 단위로 논의가 진행되면 같은 업종내에서의 임금 격차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이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업종단위 노사 협의 테이블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사용자단체가 제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거나 있더라도 그 역할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재 많은 업종은 아예 사용자단체가 없고, 있더라도 대부분 회원사의 친목단체 수준에 머물고 있다. 특히 노사관계에 대한 아무런 권한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용자들이 업종 단위에 협의를 가질 경우 노동계의 산별노조화 움직임과 맞물려 밀릴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또, 노동계가 노사합의까지 가능한 단위로 설정하고 있는 점도 걸림돌 중의 하나이다. 이런 문제는 사용자단체에 대한 법제화를 위해 노사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우선은 협의 테이블 정도의 낮은 수준에서 출발한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가진다면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경우는 업종 단위 노사협의가 일반화되어 있다. 독일은 1950년에 조직된 독일 사용자단체연맹(BDA)이 단체교섭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소속 사용자단체의 단체교섭 전략을 조정하고 법적 자문에 응하며 사회정책에 관여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용자단체는 금속엔지니어링산업(Gesamtmetall)으로, 노동력의 75%인 300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8500개의 기업이 소속되어 있다. 이 단체는 단체교섭에 직접 참여해 교섭파트너인 독일 금속노조(IG Metall)와 협약을 체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프랑스도 1945년에 결성된 전국적인 사용자단체인 CNPF에 프랑스 전체기업의 75%가 가입되어 있다. CNPF는 다시 84개의 산업별 조직으로 구성된다. 경제의 세계화에 따른 국제 경쟁의 격화, 유럽단일시장의 출범 이후 CNPF는 최소한의 관심과 역할에 만족하던 노사관계 및 고용정책에 대한 기존 태도를 바꿨다. 노동자의 직업훈련 강화, 인적자원 개발, 기업 내에서의 정보유통 등을 촉진하는 정책을 수립하는데 적극 나선 것이다.

한국 축구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체력훈련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한 히딩크 감독의 소신의 힘이 컸다. 노사관계도 다르지 않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