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유감
[시론]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유감
  • 조광식 / 스포츠 평론가
  • 승인 2002.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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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찢어진 성조기 - 미국은 올림픽을 정치로 오염시키고 상업주의로 타락케 한 장본인으로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 그래도 올림픽 정신은 지켜져야만 한다 -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을 정치색에 오염되고 편파 판정으로 얼룩진 최악의 올림픽이라 혹평을 하는 이들도 오늘날의 올림픽을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만을 추구하던 고대 올림픽에로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올림픽이 가지는 숭고한 이념, 스포츠가 품고 있는 순수성만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중되고 계승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하는 얘기에 분명하다.

그리스의 고대 올림픽 승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올리브 잎으로 만든 관(冠)만으로 만족했다. 그들은 경기를 칼로카가티아, 다시 말해 아름다움(美)과 착함(善)의 추구를 목적으로 했기에 물질적인 보상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올림픽도 시대 변화에 따라 바뀌었고, 또 바뀌고 있다.

올림픽 운동의 큰 변화는 정치 세력의 개입과 상업주의의 침투에서 비롯되었다. 스포츠를 국위 선양의 도구로 삼아 올림픽을 오염시킨 예는 히틀러 시대의 베를린 올림픽만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독일 문제, 중국 문제, 팔레스타인 문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 등 잇단 정치적 분쟁에 올림픽은 정치에서의 중립이란 이상과 동떨어지게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주최국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대회를 거부하면서 서방 여러 나라까지 대회 보이콧 대열에 가담토록 강요, 정치 논리에 희생된 반쪽 올림픽을 기록했다.

이러한 정치 논리는 다음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공산 블록의 불참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정치 논리에 의한 올림픽 운동의 오염과 훼손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패권주의 의식에 도취된 강대국에 의해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조기가 이번처럼 길거리를 도배한 듯 했던 경우는 없었다. 이번 올림픽은 시작부터 끝까지 미국의 국수주의에 휘말린, 실패한 올림픽이었다.” 이는 최근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평가 기사다.


미국의, 미국을 위한 ‘그들만의 제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유치과정에서의 뇌물 스캔들, 위령제로 전락한 개막식, 끊임없는 편파판정 시비 등 근대 올림픽 106년 사상 가장 추악한 대회임이 분명하다”는 일련의 보도가 시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동계올림픽을 솔트레이크시티로 유치하는 과정에서 일부 IOC 위원들에게 뇌물과 편의가 제공된 점이 드러나 결국 6명의 IOC위원이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당시 조직위원장이 옷을 벗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따낸 개최권은 반납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으나, 강대국 미국의 힘 앞에 정당한 여론은 힘을 잃었고 솔트레이크시티는 뻔뻔스레 동계올림픽을 치르게 된 것이다.

조직위원회는 대회 개막식에 9.11 테러 사건 때 찢어진 성조기를 IOC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입장시킴으로써 올림픽 개막식을 위령제로 둔갑시키는 동시에 미국민의 ‘애국심 불러일으키기 행사’에 세계를 강제로 참여시켰다. 거듭된 경기에서의 편파판정도 이러한 미국인들의 애국심 고양(高揚)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 국민들의 자긍심을 한껏 드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미국 선수의 우승이다. 불의를 보고는 견딜 수 없어 세계의 경찰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미국, 스포츠에서도 세계 으뜸이어야 한다는 계산은 그들 나름대로 당위성을 갖고 있을 법하다.

“승부와 성적의 순차(順次), 메달의 빛깔과 수효에 의해 숭고한 올림픽 정신이 훼손되고 모독되어서는 안된다”면서 이는 신성(神聖)모독이고 스포츠 희롱이라는 인제대 김열규 교수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면 분명 미국은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메달을 도둑질하는 작은 욕심을 탐하려다 올림픽 정신 훼손이란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한 것에 분명하다. 미국은 9.11테러를 계기로 끝이 없는 테러 박멸전을 펼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테러 주범들이 숨어있다고 하여 폭탄을 마구 퍼부었다. 1980년 당시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고 해서 우방을 선동하여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번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그 미국이 주최한 올림픽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해서, 상황이 그 때와는 다르다 해서,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면죄부를 받은 것일까. 이번 올림픽을 치르는 미국은 그래서 한층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잘 사는 부자 나라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번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을 치르면서 가난하고 힘 약한 나라들도 가지고 있는 소중한 하나, 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갖추지 못한 나라임을 제 스스로 세상에 밝혔다. 특히 세계 스포츠를 좌지우지하는 스포츠 강대국의 이미지 대신 스포츠 정신을 모독하고 올림픽을 정치로 오염시키고 상업주의로 타락케 한 장본인으로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올림픽 정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고대 올림픽이 막을 내린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대회 기간 중 전쟁 중지, 프로선수의 위장 출전 금지 등 올림픽 정신을 위배하는 일이 잦아졌던 때문이다. 모두가 지켜야 할 올림픽의 규범이 일부 힘있는 세력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 데다 날로 거세지는 상업주의와 정치세력의 간섭과 위협 때문에 올림픽의 근간이 마구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올림픽 운동의 중단 마저 초래되지 않을까 걱정의 소리가 높다.

올림픽을 지탱하는 힘은 규칙이다. 정치 논리가, 상업주의가 아무리 거세고 집요하더라도 규칙은 엄수되어야 한다. 규칙을 집행하는 심판을 ‘위기의 올림픽 시대 최후의 파수꾼’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대 올림픽의 심판관(Hellanodikai)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경기운영은 물론 선수의 자격 심사까지 맡아 처리했다. 주민의 선거에 의해 뽑힌 심판관은 행정사법장관으로부터 10개월 동안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일정한 시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자격이 주어진다. 기원전의 일이다. 오늘날의 올림픽을 진정한 세계인의 축제답게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느껴야 할 지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