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백신 정책, 또 당하는 구제역
구멍 난 백신 정책, 또 당하는 구제역
  • 이승호 기자
  • 승인 2017.03.15 0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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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5일 충북 보은의 한 농가가 구제역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후 전라북도 정읍, 경기도 연천 등지에서도 구제역 확진 판정이 나오며 1주일 만에 1,200마리의 소가 살처분 될 정도로 이번 구제역은 무섭게 퍼져나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구제역 위기경보 단계를 ‘경계’에서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했고, 컨트롤타워인 방역대책본부는 방역을 강화했지만 사그라지지 않는 구제역에 농가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가 구제역에 시달린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구제역은 1934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생했고, 2000년대 이후 꾸준히 문제가 돼 왔다. 2000년 봄 당시 젖소 2,000여 마리가 살처분되며 돼지고기 수출이 중단됐다. 2002년 5월에도 경기·충북 등지에서 구제역으로 소, 돼지 16만여 마리가 살처분됐다. 몇 년간 잠잠했던 구제역은 2010년 다시 발생하여, 경기 포천·연천 지역을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며 소, 돼지 348만 마리가 살처분돼 역대 최대 피해를 기록했다.
2010년 겨울에 발생한 역대급 구제역 피해로 국내 축산 농가가 피폐해지자 이에 대한 방안으로 정부는 소와 돼지에 구제역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백신 접종 정책에 여러 가지 허점이 지적되고 있다. 정부는 연간 200억 원대의 예산을 들여 소, 돼지에게 백신을 맞혀왔고 소의 구제역 항체형성률도 95%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 구제역 발생 농가들의 항체형성률을 살펴보면 30% 밑을 맴돌고 있다. 일부 농가의 항체형성률은 5%로 조사되기도 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의 허술한 표본조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 정부는 전국 사육 농가의 10%를 표본 농가로 선정하고, 각 표본 농가당 소 한 마리에 대해서만 구제역 항체 형성 여부를 조사하여 통계자료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각 표본농가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은 통계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소 10마리를 사육하는 농가의 소 한 마리 표본과 소 1,000마리를 사육하는 농가의 소 한 마리 표본을 같은 값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보여주기 식 수치 위주의 정책에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구제역 백신 접종을 농민들에게 맡기고 있는 점도 문제다. 현재 정부는 50마리 이상의 소를 기르는 대규모 농가는 자체적으로. 그 이하는 지자체에서 직접 관리를 하도록 하고 있다. 소규모 농장이 구제역에 더 취약하다는 정부의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수의사가 아닌 농민들이 거대한 소에게 백신을 직접 접종해야 하고, 백신을 2~8도에서 냉장보관 후 접종 시 18도로 올려 접종해야 하는 접종 방법도 까다로워 이를 전적으로 농민들에게 맡기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게다가 생후 6개월 이상인 소는 4~7개월마다 접종을 해줘야 항체가 유지돼, 농민들의 백신 접종 부담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백신의 국내 생산체계 구축이 늦어지는 점도 문제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5년 690억 원을 투입해 2018년까지 백신 제조공정을 확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현재 공장 부지선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부터 예산이 투입되어도 2018년까지 전체 공정을 완성하는 것은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신 공급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현재 국내 백신 생산체계가 없는 우리나라는 영국의 메리알(Merial)사와 같은 다국적 제약사에 백신 공급을 의존하고 있다. 백신은 갑자기 생산을 늘릴 수 있는 소비재가 아니어서 지금과 같은 구제역 대란이 일어나도 추가적인 백신을 요청하기 힘들다. 메리알사에 따르면, 2011년 구제역을 겪은 나라들 대부분이 가축 매몰에서 백신 접종으로 정책을 변경하고 있어 각국에 백신을 보내는 일정을 조정하고 백신을 한국에 집중 공급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뾰족한 백신 공급책을 내놓지 못하는 중이다. 이처럼 국내 백신 생산체계 구축이 늦어질수록 우리나라는 백신 수급 불안정을 피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구제역 파동 속에서 여러 가지 대비책들이 나오고 있다. 한 정당은 농가당 소 한 마리에 그쳤던 표본조사를 다섯 마리로 늘리자는 정책을 촉구했고, 농림축산식품부는 백신 공장을 2020년까지 재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정책들에 지친 농민들은 정부에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구제역은 더 이상 생소한 가축 질병이 아니다. 2000년 이후 구제역은 16년간 8번이나 발생했고 현재까지 약 3조 3,000억 원의 재원이 살처분 비용에 쓰였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과 재원이 없다. 이제야말로 정부는 보여주기 식 정책들보다 실속 있는 정책들을 내놓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