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포항, 이 땅에서 (3): 배천희 진각국사
문화 - 포항, 이 땅에서 (3): 배천희 진각국사
  • 김상수 기자
  • 승인 2015.04.0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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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이 남겨둔 사람으로서의 기억, 진각국사 배천희
한 사람의 흔적을 쭉 따라가다 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때가 많다. 당대의 유명한 사람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성인의 흔적을 따라갈 때 이 재미는 더해진다. 거대한 줄기만 보는 교과서의 역사와는 달리 사람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자료가 적어 단편적인 정보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만 한 사람의 인생을 짐작해야 한다는 단점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으로도 작용한다. 오늘은 포항을 ‘승격’시킨 고려 말 가장 존경받은 고승인 배천희 진각국사(법명 설산스님)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역사와는 조금 다른 재미를 찾아보려 한다.
진각국사는 고려시대 말기, 충렬왕부터 우왕 시대의 사람이지만, 우리는 그의 출생, 가족, 삶의 궤적, 심지어는 태몽까지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 탑비에 모든 사항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진각국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화엄종 국사로서 원나라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다. 배 국사가 왕사 보우의 뒤를 이어 국사가 될 때 공민왕은 ‘국사의 고향인 흥해를 겨우 현(縣)으로 둘 수 없다’며 흥해현을 흥해군(郡)으로 승격시키기까지 했다. 위에서 언급한 탑비를 찬(撰)하라고 명한 사람 역시 왕(우왕)이며, 글쓴이는 정몽주와 정도전 등 많은 사대부의 스승이며 뛰어난 지식인으로 이름을 남긴 목은 이색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힘들다. 이는 설산스님이 받은 극진한 대접에 견주어 볼 때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이도 국사의 고향, 포항에는 다양한 사료가 남아있다. 흥해에는 국사의 유허비, 사당, 무덤이 있다.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遺虛碑)는 흥해읍 학천리에 있었으나 2년 전에 흥해 양백리 백산에 옮겼다. 비석과 글씨의 상태로 보아 국사의 입적 후 고향 사람들이 추모를 위해 세웠다고 추정하고 있다. 배천희 국사사당(裵千熙國師祠堂)은 천곡사 바로 옆에 있던 것을 옮겨 양백리 백산에 유허비와 같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치른다고 한다.
그리고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배 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포항에는 남아 있다. 국사의 무덤은 흥해읍 양백리 마을 뒷산인 백산에 있다. 무덤의 앞에는 말 무덤도 함께 있는데(말 무덤이 아니라는 설도 있음), 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배 국사가 유허비 있는 곳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쏜 후, 말을 달려 현재 무덤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화살을 찾았다. 그런데 화살이 보이지 않아 화가 난 국사는 화살보다 늦은 말이라 하여 말의 목을 칼로 치고 나서 보니, 화살이 말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고 한다. 
호걸인 배 국사의 모습은 다른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엿장수가 고개를 넘어 포항에 엿을 팔러 가다가 고갯마루에서 만난 호랑이가 해치려고 하자 배 국사가 “어찌 짐승이 사람을 해치려고 하느냐. 너는 저 나루 끝 염전에 가서 빠져 죽어라”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날 포항 쪽에서 장사를 하다 나루 끝에 갔더니 정말 호랑이가 염전에 빠져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기반으로 해 포항에서는 배 국사를 배 장군으로, 배 국사의 무덤을 배 장군 무덤이라고 부른다.
한편 안타까운 것은 국사의 유허비와 사당, 무덤 등이 아무런 보호 대책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허비는 유허비 보호를 위해 세운 비각에 자물쇠도 없이 방치되고 있었으며 최근에야 배씨 가문 차원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역사에서 망각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지역이 이야기로나마 전해져 오는 하나의 '스토리'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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