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긴 고등학생
수염 긴 고등학생
  • 박관형 / 물리 12
  • 승인 2014.09.0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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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수염을 깎지 않았다. 1학년 때 제법 거뭇했고 2학년 때는 제법 히틀러 같았다. 나를 지나쳐 간 사람들은 항상 내 수염 얘기를 했다. 나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웃으며 당혹스러워했다. 다들 수염을 깎지 않는 이유를 물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웃기만 하고 답을 주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몰랐다. 멋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사연이 있지도 않았다. 그냥 수염을 자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끄러웠던 수염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자르라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그때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 웃기만 하는 나를 어쩔 수 없이 넘어 가셨다.
하지만 고삼 막바지에 엄격하신 담임 선생님께서 학습 분위기에 저해된다며 추천서를 볼모로 내세워 수염을 깎으라 하시었다. 나는 선생님께 반박하려 했지만 말보다 울음이 먼저 나왔다. 집에 와 울먹이면서 얘기하던 나에게 아빠가 말하셨다. “관형아, 마음은 아프지만 이젠 수염 없이도 너를 표현하는 법을 배울 때도 됐지 않았니.” 울며 헐떡이던 나는 이 말을 듣자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때까지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 본적이 없었고 나도 모른 새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수염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다른 나의 특별함은 수염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음 날 면도를 하고 등교를 할 땐 발가벗겨진 사람처럼 불안했다. 하지만 큰일은 없었다. 좀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나를 알아봤고 친구들은 친구였다. 나는 여전히 나였다. 나의 특별함은 수염이 아니라 내가 특별하다는 확신 속에 있었다.
정체성이란 외모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외모가 정체성을 나타내는 도구일 수 있지만 외모가 정체성을 한정할 수는 없다.
신입생 중에 자신은 남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배여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성적이 낮게 나오면 불안해하고 절망한다. 하지만 그러지 마라. 주위의 말이나 상황만으로 너의 정체성을 결정짓지 마라. 주위는 바뀌고 너도 바뀌겠지만 너는 너다. 무엇이 너인지 스스로 정하라.
거창한 말을 늘어놓으며 공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공부해라 많이 배워라. 하지만 좋은 성적에 너의 존재 이유를 걸지는 말라는 뜻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는 스스로 고민해서 결정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