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원동력은?
내 삶의 원동력은?
  • 정진욱 교수 / 물리학과
  • 승인 2014.03.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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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텍 사람들의 특징인지, 이 땅의 사람들의 그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참 바쁘게 산다. 몇 사람이 다들 편한 시간에 함께 만나기가 만만치가 않다. 이렇게 각자 나름의 바쁜 삶을 사는 것을 보니 각인의 삶을 이끌어 가는 어떤 동력은 분명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일까? 행복, 성공, 돈, 자신, 가족, 건강, ...혹시 노벨상? 작년 말에 노벨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어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학자가 노벨상 수상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곧 어렵고 복잡한 긴 연구내용을 쉽고 간단히 한 문장으로 잘 압축하는 능력이란다. 그 만큼 내용의 핵심을 잘 안다는 말일게다. ‘코이’라는 예쁜 잉어류가 있다. 이 잉어는 작은 어항에서 키우면 수 cm 정도의 크기로 자라지만 큰 수족관에서 키우면 수십 cm, 아예 넓은 강에서 발견되는 것은 1 미터가 넘게 크게 자란다고 한다. 비록 작은 도시 포항에서 바쁘게 나날을 살고 있지만 이제 우리 삶의 시공간의 영역을 넓혀 저 광활한 우주를 생각하며 오늘의 이 시간을 영원에 잇대어 보자. 우리가 과연 어떻게 변화되며 얼마나 성장할까? 저 우주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코이’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저 넓은 우주를 생각하면 우리 인간은 너무 초라해 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의 전체 크기는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라는 소우주(galaxy)를 큰 쟁반에 비유하면 그 가장 자리에 한 끝에 붙은 밥풀 하나 정도도 안 된다. 그러나 이 은하계 안에는 천억 개의 지구보다 큰 별들이 있고 저 우주(universe)안에는 이런 소우주가 또 천억 개가 넓게 흩어져 137억년 이상을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초라하지만 매일 이 분주한 삶을 끈질기게 이어가게 하는 본질적인 원동력이 정말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처음 이 질문을 던진 게 아닌 만큼 동서고금을 통틀어 보면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동일한 답이 발견된다. 곧 하나님이다. 여러 민족, 여러 형태의 종교라는 틀 속에서 달리 불리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정립되면 우리의 삶은 매우 달라지는데 과연 어떻게 변하는지 그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히 나름대로 압축해 보자.
먼저 그 출발점은 하나님은 누군가라는 질문이다. 의견이 분분할 수가 있지만 일단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요, 자연과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라고 인정해 보자.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을 만들 때 어떤 인간이 하나님께 충고하거나 도왔던가? 아니 어떤 물질이 무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을 본적이 있던가? 그런데 제한된 피조물의 어떤 능력으로도 무한한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신 만큼 알게 되는데 성경이 바로 그 책이다. 하나님이 먼저 만드신 이 자연의 창조법칙을 다시 찾는 것이 과학이다. 연구(research)란 영어단어가 다시 찾는 것이란 것도 그런 의미다. 과학의 발전사를 보면 이전의 많은 큰 과학자들은 그 동기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다. 뉴톤은 그 과정에서 미적분을 발명하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변위전류를 도입하여 암페어 법칙을 확장하면서 빛이 전자기파란 것을 증명한 막스웰을 아인슈타인은 하나님이 도우신 천재라고 평한다. 이들처럼 보다 깊은 과학연구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재인식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사람과 그의 삶을 연구하는 인문학은 어떤가? 처음부터 자연과 인간의 창조는 여러 측면에서 매우 달랐다. 하나님은 인간을 특별히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자연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만드셨다. 또 ‘자유의지’를 주셔서 기계적인 소통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하게 하셨다. 문제는 인간이 이 특권을 악한 유혹을 받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오용함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누구를 봐도 사람은 참으로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인 것 같다. 누군가는 미친 사람의 특징이 바로 주변을 외면하는 자폐적인 자기-중심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삶은 강팍해 졌으며 종국에는 모든 피조물이 죽음을 맞게 되었다. 마치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는 아버지의 간섭이 싫다며 마음대로 살겠다고 집을 뛰쳐나간 아들 같다. 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빚더미 속에서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때에 그 아들의 모든 빚을 갚고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 오도록 이 땅에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곧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관계가 회복되면 처음 창조 때의 인간의 모든 축복이 회복된다. 먼저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이 회복된다. 시공간적으로 극히 제한된 이 땅의 삶의 의미가 저 우주처럼 넓어지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저 광대한 우주를 이 작은 머리에 담을 수 있고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최소시간인 플랑크 타임 (10-43초)의 극히 짧은 순간에서부터 영원까지 생각은 할 수가 있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그에겐 이 생각들이 구체적으로 매일의 삶에서 적용되며 삶을 이끄는 진정한 능력이 된다. 이렇게 확대된 삶의 의미는 곧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이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어떤 역경에서도 인내하고 기쁨과 평안을 갖게 한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 한 사람을 저 온 우주 보다 더 귀하다고 하시며 그에게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하는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생명으로 가는 거짓 없는 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교만하고 위선적인 종교인이 아닌, 진실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회복되는 이 모든 새로운 모습을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다. 광활하고 오묘한 자연의 모습도 숨 막히게 아름답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사람의 맑은 영혼은 더욱 그렇다. 그의 참된 삶을 통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또 발견하게 된다. 이제 포스텍에서 누군가가 이 땅의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알며 서로 사랑하며 살다가 언젠가 노벨상을 훨씬 능가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되는 우리들,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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