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텍에 인문학이 존재하는 이유
포스텍에 인문학이 존재하는 이유
  • 김민정 /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14.01.0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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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1학년 교양필수과목인 <인문과 예술의 세계> 수업의 종강일이었다. 나는 그간의 수업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학생들에 대한 나의 바람을 담아 이런 요지의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부디 외부의 권위에 휘둘리거나 사회적 통념이나 편견, 오래된 관성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매순간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삶의 주체가 되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때 K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해왔다. “왜 외부의 권위에 휘둘리는 삶을 살면 안 되는 거죠? 인간도 동물인데 생존의 욕구와 쾌락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러자 저편의 P학생이 동료가 먼저 한 발언에 상당히 공감한 듯 이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교수님 말씀처럼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고 고민을 많이 하면 너무 스트레스가 커져서 오히려 불행해질 것 같아요. 포스텍을 졸업하면 저는 돈을 많이 벌어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싶어요.” 아쉽게도 그땐 이미 수업을 끝내야 할 시간이 지나서 더 이상 논의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날 K와 P학생의 발언에 충분한 피드백을 해 주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기에, 이 지면을 빌려 그날 못다한 얘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외부의 권위뿐 아니라, 사회적 통념이나 편견, 오래된 관성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매순간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삶의 주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유로운 삶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선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지향해야 하는가? 자신에게 익숙해진 행동과 당연한 생각을 좇는 것은 관성과 습관의 지배를 받는 것인 만큼 더할 수 없이 편하고 쉽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이 아무리 쉽고 편하다 하더라도, 말 그대로 관성과 습관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자유로운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깊이 ‘생각하기’보다 이미 익숙해진 사회적 통념과 오래된 관성에 따라 ‘생각나는’ 대로 행동할 때, 더 이상 ‘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 사회적 통념과 오래된 관성은 대부분 본래 내 것이 아니었기에, 이러한 관성과 통념에 종속되는 만큼 나는 ‘나다움’을 점점 잃어가고 사회의 평균적인 인간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얼굴 생김새가 제각각이듯이, 생각의 기준이나 삶의 지향이 모두 다른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이는 호기심과 질문이 넘쳐나는, 글을 깨우치기 전의 어린아이와 다 성장한 어른의 세계를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남의 탈을 쓰고, 남에게 조종되어 살기보다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삶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다수의 무리 속에서 내 외모의 다름으로 인해 타인이 나를 구별할 수 있듯이, 내 생각의 기준과 삶의 방식의 고유함에 비례하여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보다 분명해질 테니까 말이다.
다시, 그렇다면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유로운 삶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라는 점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공론의 장에서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호모포비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면, 혹은 인터넷 게임을 여가의 활용 수준에서 적당히 즐기지 못한고 그것에 중독되어 있다면, 그는 결국 사회적 통념과 인터넷 게임에 종속된 무능력하고 자유롭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말하자면 자유는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어떤 능력과 그것에 상응하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즉, 이때의 능력이란 바로 ‘사유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철저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통념과 오래된 관성을 따르는 사람은 ‘합리적인’ 사유가 아닌 ‘합리화하는’ 사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사유는, 일의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에만 매달리는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ationality)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목적의 타당성과 가치를 중시하는 목적적 합리성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물론 효율의 극대화를 강조하고 이를 위해 사람들을 극한의 경쟁으로 몰아넣는 현대사회에서 철저하게 사유하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현대사회의 이러한 원리가 포스텍이라고 예외일 리 없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사유하는 능력의 필요성을 근본적으로 제기하고 또한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포스텍에 인문학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지난 종강시간에 질문한 K와 P는 내가 고마워해야 할 학생들이다. 그들은 내 사유의 전제들을 들춰내어 다시 성찰할 수 있도록 ‘왜?’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욕심을 부려보자면, 이 좁은 지면을 통해 그들의 의문에 답변을 충분히 다하진 못했겠지만, 그들도 이 글을 읽고 ‘왜 외부의 권위에 휘둘려 살아서는 안 되는지’, ‘왜 내 삶이 쾌락의 욕망에 들리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잠시나마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