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오름돌]완전치 못한 삶에 대한 변명
[78오름돌]완전치 못한 삶에 대한 변명
  • 박지용 기자
  • 승인 2009.10.14 0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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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 칼 마르크스, 레프 톨스토이,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폴 사르트르, 노암 촘스키. 이 시대의 사상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사상가들이다. 이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고, 이들의 위대한 업적을 봐오면서 존경받아야 마땅한 인물로 ‘주입’당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이 완전한 삶을 살았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조차 두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삶의 모습을 존경하고, 이들을 본받아 완전한 삶을 살고자 꿈꾼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재조명해보면 어떨까.


현대적인 교육 철학의 한 획을 그은 <에밀>을 쓴 루소는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고아원에 내다버렸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인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주창한 <자본론> 등의 저서를 통해 노동자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그는 가정부를 45년간이나 착취했다. <부활>ㆍ<전쟁과 평화>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던 오만에 가득 찬 나르시시스트였고, 사창가를 드나들면서도 여성과의 교제가 사회악이라고 여길 만큼 비정상적인 인물이었다.


<노인과 바다>ㆍ<무기여 잘 있거라> 등으로 유명한 헤밍웨이는 병적일 정도로 거짓말을 일삼았다고 한다. 현대 철학의 가장 큰 획인 실존주의 철학의 대부 샤르트르는 그의 일기에 ‘나는 아롱과 철학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여자들과 사소한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다’라고 쓸 만큼 그의 바람기는 유명했다.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으로 일컬어지는 금세기 최고의 지성 촘스키는 자신의 이념적 도그마에 빠져 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 만든 허망한 상징조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기자는 이러한 사실들을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폴 존슨이 쓴 <지식인의 두 얼굴>을 보고 알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이 글의 작가가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뉴욕 타임스>와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을 대변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석학들도 삶이 완전치 않았으며, 그 중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지식인으로서 정의롭고 완전한 삶을 살기를 요구한다. 특히 흔히 말하는 교육 잘 받은 ‘지식인’에게는 필수적인 항목이다 못해 정의롭지 못한 지식인은 오히려 사회악이라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정의롭지 못하고 완전치 못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자신의 사상ㆍ이론과 모순되는 삶을 살고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지양해야 하지만,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불완전성은 어찌해야 할까.


우리 모두가 석가모니ㆍ예수ㆍ공자 등과 같은 성인군자라면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성인군자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제 아무리 존경받고 뛰어난 석학이라 해도 완전무결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현대인이 존경하는 위대한 분들의 삶을 보니 그럴 수 있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