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오름돌]20대와 소신
[78오름돌]20대와 소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09.09.23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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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글을 쓰기 위해 펜을 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정작 글로 옮길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머릿속의 생각이 글로 적혀 나오는 순간 주어지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결코 책임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책임을 지기에는 기자의 지식이 턱없이 일천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반되는 의견 모두에 발을 디딘 채로 양쪽 모두를 비난할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단 기자뿐만이 아니다. 현대를 사는 많은 20대가 자신의 의견을 갖기를 거부한 회색분자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색을 잃어버린 채 회색으로 살아가는 20대는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기인한다. 사회학자들은 ‘무한 경쟁’, ‘골방 공부’가 20대가 가진 무관심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는 한창 꿈에 부풀 학창시절에 IMF로 인해 좌절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목전에서 지켜봐야 했고, 사회생활을 준비할 20대가 가까워오자 경기 침체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회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 아니 우리는 골방에 들어가야 했고, ‘생존’에 대한 기초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현재까지도 그 악순환은 반복되고 있다. 20대의 무관심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안건에 대한 ‘무의결’로 이어진다. 각각의 안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들을 알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슈에 대해 의견을 갖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20대는 의견을 갖기를 보유한 채로 사태를 관망한다. ‘행동하는 양심’에 가치를 두지 않으면서 ‘수입 쇠고기 문제’, ‘미디어 법 반대’ 등의 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을 비웃는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 의견에 무게를 싣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각각의 의견을 견지하는 모든 이들을 비판한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는 식이다. 그저 ‘대세’를 따라 적당한 의견을 따르는 척을 하면 최소한 비난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편의주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끊임없이 한 쪽 편에 설 것을 종용하는 자들에게 20대는 복덩어리로 대접받는다. 사회가 더 많은 회색분자를 양산할수록 기득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할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립을 지키는 무고한 자들을 모함하려는 극단주의자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격동의 시기에 늘 변화의 중심에 섰던 20대가 사회의 변두리로 숨어드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참으로 혼란한 시기이다. 여기저기서 진실이라고 주장되는 거짓들이 넘쳐난다. 무관심에서 벗어나 각각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도록 하자. 건설적인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자. 자신과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의 비판을 수용하고 그에 대한 반박할 점을 찾을 때 내가 가진 논리는 더욱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J. F 케네디는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는 문구를 인용했다. 비록 지금은 이 인용구가 책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담아 고전을 유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이 말을 누가 했건 간에 그것 자체가 시사하는 의미가 작다고 할 수는 없다. 작금의 현실을 보건데 가장 뜨거운 곳이든 비교적 차가운 곳이든 간에 지옥의 공간은 한국의 20대를 수용하기에도 벅찰 것으로 보인다. 지옥으로 가는 행렬에서 열외로 빠져 나오고자 하는 자, 혼란한 시기에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는 것만이 그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