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오름돌-착각과 현실의 경계
78 오름돌-착각과 현실의 경계
  • 조규하 기자
  • 승인 1970.01.01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대학은 UI사업을 통해 공식 명칭인 ‘포항공과대학교’ 대신 ‘POSTECH, 포스텍’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포스텍’보다는 ‘포항공대’라는 호칭이 익숙한 것이 사실이고, 대학 밖에서는 포스텍이 우리대학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포스테키안이라면 대학의 이름과 관련한 일화를 한번쯤은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필자가 중학생이었을 당시 포항공과대학교의 명칭에 대해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진 적이 있었다. 분명 포항공대에는 자연과학 분야, 그러니까 현재 필자의 전공인 화학뿐만 아니라 수학·물리학·생명과학과가 존재하고 있는데, 왜 포항‘공과’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가, 공대이면 공학 분야만 다루는 대학이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한편, 당시 필자는 화학보다는 생명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화학에 대한 개념이 약했나보다. 그래서일까, 우리대학의 화학과에서는 화학의 기초이론보다는 우수한 제반시설을 바탕으로 실험 실력만을 키우는 곳이라는 착각을 하곤 했었다. 난해한 실험기구를 다루는 방법과 남들보다 빠른 시간 안에 높은 수득률을 얻는 방법을 연구하고, 화학구조도 모른 채 시약의 이름과 가격만을 외우는 학문이 화학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착각은 어쩌면 중학생이 배우는 화학이란 그저 간단한 현상들에 대한 설명이 다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접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착각한 것이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의 다리만을 만져보고 코끼리를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지식의 영역이 넓어지고 화학이 어떠한 학문인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오해가 풀렷다. 실험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를 뒷받침해주는 기초이론의 연구가 없다면 학문의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론과 실험의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을 만큼 화학에서 두 가지 요소는 함께 발전해나가고 있다.
최근 필자는 그 당시의 착각들이 만약 사실이었다면 우리대학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게 되었다. 일단 ‘공과대학’으로 설립되었으니 자연과학의 이론분야를 연구하는 4개 학과는 애초에 없었거나, 생겼더라도 없애라는 압박을 받았을 수도 있다. 대신 수학공학과·물리공학과·생명공학과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기초이론 대신 건강한 세포를 많이 길러내는 방법, 영구기관을 만들어내는 방법, 혹은 통계자료를 재빨리 분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지 않을까.
자, 그럼 이제 공학을 실기로, 자연과학을 예술로 바꿔서 상상해보자.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다. 상상속의 한예종에서는 이론을 가르치지 않으며, WHY에 대한 이해 없이 HOW만을 강조할 것이다. 훌륭한 문장력보다는 잘 팔리는 책을 써내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고, 작곡실력이나 연주실력보다는 많은 악보를 외우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또 남들보다 붓을 잘 다루게 되어 작품을 빨리 그려내는 것이 우수졸업생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중학생 수준의 상상일 뿐 현실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