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오름돌] 알유해피?
[78오름돌] 알유해피?
  • 강탁호 기자
  • 승인 2008.11.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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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는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프로야구리그 속에서 아마추어의 야구를 견지한 꼴찌팀 삼미의 짧은 역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더 열심히 해! 안 그럼 죽는다. 힘든 걸 이겨내는 게 프로야! 열심히 해. 던져! 잡아! 뛰어! 쳐! 빨리, 더 빨리”라고 외치는 세상은 결국 자본을 위함이었다고. 여기서 뽑아본 최근 뉴스 몇 개. OECD 자살율 1위, 초등학생 중 48%만 행복하다고 느껴, 국제중학교 개교 임박 입시 열풍, 대학생에게 학점은 기본, 자격증은 필수, 늘어나는 기러기 아빠, 행복지수 세계 102위. 별로 행복한 사회는 아닌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는 학원이라도 다녀가며 영재가 되어야 했고, 중학교 때는 특목고에 가기 위해 올림피아드를 준비했다. 대학도 녹록치 않다. 학점이 떨어지면 장학금은 없어진다. 취업을 위해서는 스펙 관리도 필수이다. 회사엘 갔다. 승진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자녀들의 교육은 다른 데서 받게 하고 싶다. 외국 유학 보낼 돈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리고 앞선 모든 문장에는 ‘남들 보다’라는 부사가 달라붙는다. 이 경쟁의 패배자는 도태된다고 책들은, 학교는, 드라마는 말한다. 이 끝없는 싸움의 승자는 누굴까? 박민규의 메시지대로면 이 싸움에서 득을 보는 자는 자본인가? 자본은 최저 비용으로 최대 성과, 향상된 수치만을 원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떻든 별 상관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행복이 희생되든가, 사람들의 도구화가 진행되든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다. 사회는 우리에게 항상 무엇이 되라고 한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구성원들이 제 역할을 다하고 공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작금의 과도한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주의들이 구성원들의 행복을 외면하고 우리를 끝없는 경쟁의 레이스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사회에서 그토록 요구하는 ‘인적자원’도 결국 사람 그 자체가 아닌 자원으로서의 사람을 말함이 아닌가. 항상 높음만을 바라보게 하고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큰일날 것이라 하는 강박적인 믿음이 팽배해있다. 어찌보면 자본의 논리와 함께 우리가 만들어낸 믿음, 우리에게 주입된 이미지들이 경쟁구도를 심화시키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실력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어느덧 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글로벌’적인 보편성을 띠고, 또 기득권의 마음에 드는 원리이기 때문에 쉽사리 바뀔 것 같지 않다. ‘틀을 깨버리자’와 같은 이상적인 말은 쉽사리 하지 않으련다. 현실에 순응해 억지로라도 큰 꿈을 만들어간다 해도, 작은 꿈만은 남아 버텨나갈 힘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뜨거운 경쟁의 레이스에 가끔씩 비도 내려주고, 인적자원이 아닌 사람 그대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의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열 살 남짓한 어린이들조차 경쟁으로 내모는 무한경쟁의 도그마에 맞서는 목소리가 됐으면 좋겠다. 사회가 깔아준 레일 위를 행복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내달리기보다는 거창하진 않아도 개인이 행복한 ‘마이웨이’하는 발걸음이 됐으면 좋겠다. 뛰지 않으면 죽는다고, 도태된다고 사회가 말할지라도 내가 죽지 않으면 된다. 항상 무엇이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은, 그래서 숫자와 경쟁만으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아? 박민규는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프로야구리그 속에서 아마추어의 야구를 견지한 꼴찌팀 삼미의 짧은 역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더 열심히 해! 안 그럼 죽는다. 힘든 걸 이겨내는 게 프로야! 열심히 해. 던져! 잡아! 뛰어! 쳐! 빨리, 더 빨리”라고 외치는 세상은 결국 자본을 위함이었다고. 여기서 뽑아본 최근 뉴스 몇 개. OECD 자살율 1위, 초등학생 중 48%만 행복하다고 느껴, 국제중학교 개교 임박 입시 열풍, 대학생에게 학점은 기본, 자격증은 필수, 늘어나는 기러기 아빠, 행복지수 세계 102위. 별로 행복한 사회는 아닌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는 학원이라도 다녀가며 영재가 되어야 했고, 중학교 때는 특목고에 가기 위해 올림피아드를 준비했다. 대학도 녹록치 않다. 학점이 떨어지면 장학금은 없어진다. 취업을 위해서는 스펙 관리도 필수이다. 회사엘 갔다. 승진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자녀들의 교육은 다른 데서 받게 하고 싶다. 외국 유학 보낼 돈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리고 앞선 모든 문장에는 ‘남들 보다’라는 부사가 달라붙는다. 이 경쟁의 패배자는 도태된다고 책들은, 학교는, 드라마는 말한다. 이 끝없는 싸움의 승자는 누굴까? 박민규의 메시지대로면 이 싸움에서 득을 보는 자는 자본인가? 자본은 최저 비용으로 최대 성과, 향상된 수치만을 원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떻든 별 상관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행복이 희생되든가, 사람들의 도구화가 진행되든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다. 사회는 우리에게 항상 무엇이 되라고 한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구성원들이 제 역할을 다하고 공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작금의 과도한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주의들이 구성원들의 행복을 외면하고 우리를 끝없는 경쟁의 레이스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사회에서 그토록 요구하는 ‘인적자원’도 결국 사람 그 자체가 아닌 자원으로서의 사람을 말함이 아닌가. 항상 높음만을 바라보게 하고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큰일날 것이라 하는 강박적인 믿음이 팽배해있다. 어찌보면 자본의 논리와 함께 우리가 만들어낸 믿음, 우리에게 주입된 이미지들이 경쟁구도를 심화시키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실력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어느덧 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글로벌’적인 보편성을 띠고, 또 기득권의 마음에 드는 원리이기 때문에 쉽사리 바뀔 것 같지 않다. ‘틀을 깨버리자’와 같은 이상적인 말은 쉽사리 하지 않으련다. 현실에 순응해 억지로라도 큰 꿈을 만들어간다 해도, 작은 꿈만은 남아 버텨나갈 힘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뜨거운 경쟁의 레이스에 가끔씩 비도 내려주고, 인적자원이 아닌 사람 그대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의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열 살 남짓한 어린이들조차 경쟁으로 내모는 무한경쟁의 도그마에 맞서는 목소리가 됐으면 좋겠다. 사회가 깔아준 레일 위를 행복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내달리기보다는 거창하진 않아도 개인이 행복한 ‘마이웨이’하는 발걸음이 됐으면 좋겠다. 뛰지 않으면 죽는다고, 도태된다고 사회가 말할지라도 내가 죽지 않으면 된다. 항상 무엇이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은, 그래서 숫자와 경쟁만으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