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상생하는 내셔널리즘의 길
[문화기획] 상생하는 내셔널리즘의 길
  • 강탁호 기자
  • 승인 2008.09.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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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척과 이분법을 넘어서
상호 연대 강화하고, 이성적 비판·토론문화 정착시켜야


1) 일본의 내셔널리즘
독도 영유권 주장, 역사왜곡 교과서, 군위안부 문제, 평화헌법 개정 등 일본에 대해 한국인들이 부정적 감정을 갖게 되는 도화선은 많다. 얼마 전 광복절에도 일부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했고, 우익단체에서는 시위를 통해 세력을 과시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강한 일본’을 외치는 주장의 중심에는 우익이 존재한다.

와다 하루키 동경대 교수는 “일본의 보수파와 우익적 내셔널리스트들이 한일 간의 화해를 방해”하고 있다고 한다. “좌익은 일본의 국가와 국민을 비판하고, 한국의 일본 비판에 동조하여 비판적인 한일연대를 만들려” 하지만 좌익이 소수파이기 때문에 “일본의 중도적인 다수파와 미디어는 동요되고 혼란에 빠져, 자신감을 얻은 우익의 목소리에 이끌리고” 있다고 한다(한일 역사인식논쟁의 메타 히스토리).

우익의 역사 미화는 일본 패전 이후부터도 꾸준했지만, 우익세력이 본격적으로 내셔널리즘을 제창하기 시작한 것은 94년의 호소가와 총리, 95년 무라야마 총리의 식민 지배 사과 담화를 기점으로 한다. 두 총리의 식민지배 사과 발언과 일본여성단체를 중심으로 한 ‘위안부 보상운동’ 등에 우익세력은 위기를 느끼게 되고, 이들의 위기의식은 우익세력의 결집으로 이어져 역사미화 교과서, 야스쿠니 참배 등의 갈등 소재를 재생산했다.

숙명여대 일본학과 박진우 교수는 “냉전체제 붕괴 이후 국제정세의 급속한 변화에 따른 정치겚본瑛?대국화의 지향과 근린 아시아 국가의 일본 비판에 대한 반발심리, 90년대 이후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사회적인 불안 심리의 확산, 과대한 북한 위협론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 일본의 우경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다. 이어 박 교수는 일본의 우경화가 동아시아 평화에 위협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면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될 때 일본 사회 내에 존재하는 재일조선인과 같은 마이너리티들을 이질적인 존재로 차별·억압하는 경향이 강해지게 되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또한 평화주의를 주창하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줄어들게 되면 우리도 연대의 끈을 놓치게 된다며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


2) 상호존중을 위한 시도들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걸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감정의 논리가 아닌 이성의 논리로 접근해야 될 많은 일들이 민족적 자존심이라는 이름 아래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대중의 일방통행으로 결정되고 있다. 맹목적인 민족·국가주의는 근거가 아닌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명백한 근거로, 타자의 목소리를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하기 때문이다. 외부 국가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우리사회 내에 존재하는 민족적 타자에 대한 차별도 우리 민족 외의 것은 근거 없이 낮추어 보는 배척심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순혈주의·민족우월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정치가, 대중심리의 선동과 영합해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떨친다는 것은 많은 전쟁과 린치를 통해 역사가 이미 보여주었다. 자기성찰과 상호존중의 의식과 시도가 선행되어야 국가·민족 간의 불신을 넘어 화해와 발전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동아시아 한중일 역사 발전에 성과가 있었다면 공동 역사교과서의 편찬을 꼽아볼 수 있다. 한중일 역사학자와 일선학교의 역사 선생님들이 모여 공동집필을 통해 편찬한 이 책은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자국의 시선 말고도 타자의 시선을 끌어옴으로써 새로운 연대의 길을 제시한다.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사에 그치지 않고 타자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 보는 데 이 작업의 의의가 있는 듯싶다. 우리는 중학교부터 국정교과서로 ‘국사’ 과목을 필수로 배운다. 국사라는 단어의 뜻은 그대로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국사를 배우는 목적은 ‘한 나라의 모든 국민이 그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알게 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국사란 민족과 국민 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일국사인 것이다. 그리고 일국사는 외부 타자의 시선은 배제한 채 국가가 바라보는 역사와 가치관만을 다루는 잘못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화’의 논리 앞에서 국가가 바라보는 역사에 대한 시선 외의 반대되는 시선은 잘못된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일각에서 다른 국가의 역사교재를 부교재로 쓰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절대화하지 말고, 상대화하자는 의도이다.

몇 년 전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의 비율이 전체인구의 1%에 달했다는 조사결과가 있었다. 앞으로 이 비율은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인프라와 의식이 과연 이 비율을 수용할 수 있을까? 외국여성들이 패널로 참여하는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에티오피아 출신 패널이 ‘한국사회의 인종차별을 말하며’ 눈물을 흘렸던 장면을 떠올리지 않아도 인종과 관련한 차별은 웬만큼 알고 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는 몇몇 관광객들이 보이는 무례한 행태나 혼혈에 대한 차가운 사회의 눈초리 등등. 외국에 나가있는 해외동포가 잘 대접받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에게는 우리가 받길 원하는 만큼의 수준으로 대우해 주고 있는가? 긍정의 답이 쉬이 내려지지 않는다.

기사의 시작은 내셔널리즘이었지만, 이를 국가 간 문제에서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문제로 넓게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맹목적 내셔널리즘이 자국겴薇适렝?존재와 생각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과는 다른 존재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비단 맹목적 내셔널리즘에 대한 상생적인 처방을 넘어 우리사회를 보다 건강한 사회로 만드는 길이 아닐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어디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