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의 향연을 찾아서 6 - 의사소통의 즐거움
의사소통의 향연을 찾아서 6 - 의사소통의 즐거움
  • 박상준 /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06.1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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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질문명, 정보 그리고 둔감함의 문제
물질문명이 발달해갈수록 커지는 문제는 무엇인가. 인간과 사회, 생명의 근본 문제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성을 해치는 것들,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둔감함이야말로 현대문명이 낳은 근본적인 문제라고 하겠다. 이러한 둔감함은 특정 사건에 있어서 매스미디어에 의해 사실상 강제로 강화되며 보다 일상적으로는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커지고 있다.
이라크전의 폭격 장면이나 9·11 비행기 테러 장면 등을 텔레비전을 통해 반복적으로 보다 보면, 그 과정에서 죽었을 수많은 생명과 그들을 잃은 살아남은 자들의 지극한 슬픔은 어느덧 잊어버리고, 흡사 컴퓨터 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도 된다. 마찬가지로 몇몇 욕설을 발어사처럼 쓰다 보면, 욕이 일상화된 사회 현상 자체를 의식할 수조차 없게 된다.

이러한 예들은 미디어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다루는 사건들 모두를 ‘정보’로 동일화함으로써 미디어는, 개별 사건의 특수성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인간적인 감수성을 그만큼 둔하게 만든다.
미디어의 이러한 메커니즘은 언어의 일상적인 사용 방식,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잘 보여주는 우리들의 언어 구사 방식에 근거하고 있다. 무언가를 가리키고 지시하는 언어의 수단적 성격만 주목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그럼으로써 언어가 행하는 본질적인 기능 곧 대상을 규정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며 우리들의 사고를 특정하게 조직화하는 등의 보다 중차대한 기능은 사실상 잊혀진다. 그 결과로, 개별적인 사건들이 자신의 개별성·특수성에 걸맞은 언어 표현을 입지 못한 채 일반적인 정보로 환원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인간과 사회, 생명의 근본 문제에 대한 감각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품위를 지키고 사회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감각을 되살리는 일 또한 언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의사소통행위의 의의를 십분 이해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의 윤리성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언어활동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리는 일이 요청된다.

2 윤리와 폭력, 언어활동이 나아가는 천당과 지옥
언어의 윤리성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언어 내용이 갖는 윤리적 성격과, 의사소통행위의 양상이야말로 사회 윤리의 척도라는 특성이 그것이다. 물론 두 가지가 명확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을 가늠하기 위해 언어 내용의 윤리성과 별도로 의사소통행위의 양상을 윤리적인 맥락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언어가 존중되고 언어생활이 올바르게 이루어지는 것과 윤리적인 사회는 나란히 간다고 할 수 있다. 말을 고르지 않는 상황에서는 사회 윤리도 제대로 지켜지기 어렵다. 윤리가 약화될 때 사람들은 법에 의지하여 행동하게 되며, 법이 적용되기 어려운 틈새에서는 여러 유형의 폭력이 전면에 나설 여지가 커진다. 이렇게, 언어를 고르지 않는 사회는 무섭다. 그 속에서의 삶은 기껏해야 무료하고 의미 없으며, 나쁜 경우에는 대단히 각박하고 신산스럽기 마련이다.

충분히 풀어 말할 여유는 없지만, 이러한 상황의 근본 원인은 바로 말이 존중되지 않는 데 있다. 의사소통행위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법과 권력이라는 비인격적인 제3자에 의존하게 된다. 그 전에 사실을 왜곡하고 편의적으로 강조하며 인신공격에 나서는 등 언어의 폭력이 기승을 부림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요컨대 언어의 원리가 존중되지 못할 때, 물리력과 권력 나아가 폭력이 앞에 나서는 비윤리적인 사회가 한걸음 가까이 온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윤리가 실종된 이런 언어문화가 우리 사회의 실상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지우기 어렵다.
하루에 100통씩도 날린다는 청소년들의 휴대전화 문자들과, 인터넷을 채우고 장식하는 수많은 잡문들, 신문지상에 넘치는 무색무취의 타성적인 칼럼들, 일반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중의 눈앞에 사상누각을 세우는 여러 전문가들의 글들, 언제나 빤한 이야기를 서로 목청 높여 외치는 지겨운 정론들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언어문화야말로 인간사회의 윤리를 심각하게 해치는 것이 아닌지 심히 두렵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를 왜곡하는 뻔뻔스런 이데올로기의 언어와 민의를 무시하는 폭력적인 언어가 공공 담론을 지배하고,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언어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지나치게 살벌한 어휘들이 시도 때도 없이 꿈틀대는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헛된 말이 넘치는 현상 속에서 참된 말이 사라진 경우에 가까운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가능케 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며 우리의 사고를 깊게 하는 언어의 진정한 기능은 한없이 위축되고, 빈껍데기 같은 말을 주고받고 진열하는 행위만 남은 까닭이다.
이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통로 또한 의사소통행위이다. 폭력에 근거한 지배체제를 없애고 등장한 근대 시민사회가 내세운 공화주의의 핵심이란, 대화를 통해 협상하고 토론에 이어지는 표결로 타협하는 의사소통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사소통방식이 제대로 수행될 때 정론은 정론다워지고, 공론이 공공성을 회복하며, 여론이 맹목에 빠지지 않게 되면서 언어 윤리의 향상과 더불어 사회가 투명해질 것이다.
보다 세세한 영역에서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상호주체적인 의사소통행위가 일상화될 때 우리들의 삶의 공간 전체가 보다 윤리적인 면모를 띠게 될 것이다. 이전 글들에서 강조한바 ‘수행과정을 의식하면서 타인을 고려하는’ 친절한 말하기겚訪껑? ‘전언의 합리적인 핵심을 살려서 이해하는’ 적극적인 듣기ㆍ읽기가 이에 요청된다.

3. 의사소통행위의 예술과 즐거움
의사소통행위의 윤리성이 회복된 상태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경지는 의사소통행위의 미학이다. 표현이 낯설 수 있겠는데, 우리의 의사소통행위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되는 그러한 상황을 의미한다.
언어활동이 예술이 된다 했지만 뭔가 거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위든 능숙해지게 되면 즐거움을 가져다주게 마련이다. 이 즐거움이 반복되면 실용적인 목적을 벗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한다. 그와 더불어 행위 또한 다른 무엇의 수단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다른 무엇의 수단으로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행위들,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들은 미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말 그대로 일종의 예술이 되는 것이다. 기술이 기예가 되고 무술이 무예가 되는 경우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의 미적인 행위는 그것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즐거움을 준다. 다른 목적을 정해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즐거움은 항상적이다. 상황이나 여건에 의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나 그 가치를 잃지 않는 이러한 즐거움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재미와 구별된다.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바로 이러한 경지가 있다. 의사소통으로 업을 삼되 노역이 아니라 즐거움의 원천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경지에 다다른, 의사소통의 예술가라 할 것이다. 그러한 예술가는 아니어도, 우리들 또한 말이나 글이 잘되어 유쾌함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특정한 의사소통행위로 인해 타인과의 정이나 유대가 더욱 깊어지거나 할 때, 그 순간 우리는 언어활동을 예술의 경지에서 수행한 셈이다.
말하기나 글쓰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사실 모든 사람이 의사소통의 예술가일 필요도 없지만, 의사소통행위에서 즐거움을 느껴보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여러 모로 유익하다. 어떤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즐기며 하라는 격언에 비추어 보아도 그러하다. 언어를 떠나 살 수는 없는 이상, 언어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최상이다. 의사소통의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게 되니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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