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우리의 모습] 2학년 학생기자의 포스팅
[2020년 우리의 모습] 2학년 학생기자의 포스팅
  • 문중선 기자
  • 승인 1999.11.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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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모든 내용 공개해서 개발 상업성 배제
오픈소스 방식 프로그래밍 FreePSD가 크게 기여
보드 (Board) : Postechian
글쓴이 (From) : Reporter(학생기자)
날짜/시간 (Date) : 2020년11월26일
제 목 (Title) : FreePSD 취재 얘기

오늘은 바로 FreePSD 모임 20주년 기념일이었다. 내가 가장 포항공대에 오고 싶었던 이유였던 FreePSD. 그렇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와서 포항공대신문 학생기자로 일하게 된 뒤로는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FreePSD 회원도 되지 못한 채 그냥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FreePSD 전세계 소프트웨어 개발 문화를 이끌고 있는 모임이다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내 관심을 끌기 충분했었다. 내가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부터 FreePSD 계열 소프트웨어만 쓰다 보니 그런 것일까? ‘용가리’와 엑스 세포(X-Cell), ‘통집’ 모두다 내게는 친숙한 소프트웨어가 되어 버렸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요즘에는 소프트웨어가 모두 오픈 소스 방식으로 개발된다. 내 생각에는 당연한 것 같은데 10년 정도 전만 해도 비싸게 돈주고 구입해야 했다고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일이 없으니까.

FreePSD는 웹브라우저 ‘용가리’와 워드프로세서 엑스 세포, 텔넷 연결 클라이언트 ‘통집’같은 프로그램을 차례로 전세계에 히트시키면서 오픈 소스 방식에 일조를 했다고 한다. (누가 FreePSD 프로그램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프로그램을 돈주고 사겠는가?) 세계 웹브라우저 시장의 70% 정도를 ‘용가리’가 장악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통집’같은 프로그램도 만만치 않다. 지금 포스비에 접속한 프로그램도 ‘통집’이다.

오늘 20주년 모임에는 우리 학교 다닐 때 FreePSD를 만들었다고 하는 CALTECH의 K교수도 참여하였다. 나는 학생기자라는 직책 덕택에 K교수를 인터뷰하는 행운도 얻을 수 있었다. K교수는 매우 앳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지금 40세라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의외로 수줍음을 많이 타서 취재하는 내가 더 부끄러웠다.

“반가워요. 저는 K라고 하구요. 제가 포항공대 98학번이고 또 신문사에서도 일한 적이 있으니까 한 20년 정도 선배가 되네요.”
앗, K교수가 우리 학교 신문사 일을 한 적도 있다니 참 신기했다. 인사를 나눈 뒤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FreePSD를 처음 만들 때 어땠나요? 혼자서 만들지는 않았겠죠? 학사과정 때 FreePSD 그룹을 만든 게 정말인가요?”

“아, 너무 갑자기 많은 걸 물어 봐서 조금 당황스럽네요. (웃음) 처음 만들 때는 그냥 장난처럼 만들었어요. 2000년 겨울에 할 일은 없는데 뭔가 하고 싶기는 하고…. 그래서 제 친구 T를 끌어 들여서 웹브라우저 하나 만들어 보자고 했죠. 마침 그 때는 넷스케이프라는 프로그램 소스를 공개한 지 몇 년 지난 때였거든요. 그 때 통집에서 FreePSD라는 술집 이름도 정하고 나중에 텔넷 프로그램 만들면 ‘통집’이라고 이름 붙이자고 하던 기억도 나네요. 그 뒤로 넷스케이프 소스를 하나하나 분석해 가면서 몽땅 ANSI C++로 다시 코드를 만들었죠. 2001년 여름쯤 되니까 1차 버전을 만들었어요. W3C 표준을 완벽하게 지원하자는 것이 우리 목표였죠. 제 친구랑 둘이 사소하게 만든 프로그램이라 그냥 ‘모질라’를 흉내내서 ‘용가리’라고 이름 붙이고 ftp 사이트에 소스까지 몽땅 올렸죠. 그런데 1.0이 시작되니까 주위에서 막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오픈 소스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했던 것이 적중했던 거예요. 시작할 때는 정말 별 것 아닌 프로그램이었는데 주위에서 저희가 모르던 것도 마구 고치니까 프로그램이 일취월장했죠. 그 뒤로 FreePSD 이름이 떴어요. FreePSD에서 뭘 시작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누군지 도저히 알 길도 없는) 버그도 잡아 주고, 성능 개선도 하고 그랬죠.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정말 고마워요.”

“오픈 소스 방식이 그때부터 정착하기 시작한 거군요?”

“네, 우리가 FreePSD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니까 다른 데서도 옹기종기 프로그램 제작 그룹들이 생겨나더라구요. 그 중에서 성공한 그룹은 사실 얼마 안되었어요. 오픈 소스라는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저작권을 조금이나마 지켜보려고 하는 시도가 사람들의 반발을 많이 샀기 때문이죠. 대신 ‘작은 사람’ 같은 K대학교 그룹은 아직까지도 FreePSD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죠.”

“‘통집’도 그 때 시작한 것인가요?”

“하하, 네 맞아요. 모임 이름 붙일 때 그냥 장난스럽게 얘기했었는데 리눅스에서 ‘한텀’같은 소프트웨어를 빼면 고급 텔넷 환경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없다는 데 착안해서 일을 시작했죠. 그 때는 이미 FreePSD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개발하는 데 시간도 별로 안 걸렸어요. 우리가 추상화(abstraction)해서 디자인만 해주면 누군가가 즉시 ftp로 세부 사항(implementation)을 프로그래밍해서 올려주는 방식이었죠. 아마 2001년 겨울쯤이었는데, 그 때 후배도 뽑고 해서 정식으로 모임이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후배들도 참 우수했나 보군요.”

“네 맞아요. 대학에서도 그쯤 되니까 FreePSD에 지원을 많이 해주었거든요. 그래서 검색 엔진 ‘효자’도 만들 수 있었죠. 상업 광고 전혀 없는 포털사이트를 만들다 보니까 정보가 알차졌고 또 오픈 소스 사이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주니까 우수한 정보가 모일 수밖에 없었죠.”

“네, 저도 ‘효자 코리아’에 자주 가요. 생각나는 검색어가 없으면 그냥 용가리에서 ‘www.hyoja.co.kr’을 치는 식이죠.”

“(웃음)…. 참, 제가 너무 바빠서 인터뷰는 이만 마쳤으면 좋겠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헉, 그 동안 시간이 벌써 다 되었구나. 아직 못한 질문도 있는데 돌아가면 편집장한테 혼나겠군.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미국에서 오늘 여기까지 와 준 선배인데.

“네,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고요. 다음에 기회 있으면 꼭 다시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네 그래요. 제가 시간을 많이 못 내서 정말 죄송하네요. 신문에 FreePSD에 대해서 잘 좀 써 주세요. (웃음)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