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의거 40주년] 지난 세기 민주화 여정...그리고 현재의 4·19정신
[4·19의거 40주년] 지난 세기 민주화 여정...그리고 현재의 4·19정신
  • 정태헌(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 승인 2000.04.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세기에 풀지 못한 채 결국 세기를 넘긴 한국현대사의 과제는 민주화와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남북한 각각의 생산력과 사회발전의 탄력성을 갉아먹는 적대적 대치상태를 푸는 데에 있다. 이 두 과제는 사회구성원의 보편적인 의식 수준 향상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는 결코 추상적인 담론의 소재가 아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말한다면 개인과 사회의 부가가치 생산 범주, 즉 돈이 되는 길을 넓히고 비생산적 낭비를 줄이는 길이다. 즉 부패와 각종 폐쇄구조를 무너뜨리고 각 사회구성원의 에너지 분출구를 열어주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말한다.

쉬운 예를 들어 보자. 전두환정권 시절에 ‘평화의 댐’ 공사를 둘러싸고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불필요한 정보차단 없이 건전한 토론문화 속에서 서울을 삼킬 댐을 만들기 위해 북한에서는 얼마나 큰 댐을 만들어야 하고 그게 가능한가 하는 상식적인 의문이 수용될만큼 열린 사회였다면 수백억원을 낭비하면서 세계에 비웃음까지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국민이 부담져야 하는 금융기관의 천문학적인 부실대출도 개인적인 정실과 연줄, 관권에 의한 경제외적 요인이 지배하는 비민주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된다. 그만큼 자금의 생산적 이용이 봉쇄되고 경제발전의 내실은 멀어진다. 인간의 능력 개발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신분제나 성차별적 제도와 문화도 전체 사회발전의 가능성과 사회구성원의 이익을 좁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신분제가 없어진 오늘에 이르는 동안 알게 모르게 진척된 민주화는 앞세대의 땀과 피의 대가라는 사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제 부패와 각종 연줄로 인한 폐쇄적 패거리주의, 비합리적인 편견으로 사회구성원과 전체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오늘의 문제는 지금 세대와 뒷세대를 위해 우리가 풀어야 하는 과제이다.

1950년대는 6·25 전쟁의 참담한 파괴를 겪은 후에 미국의 원조에 의지한 채 가까스로 경제를 꾸려갔지만 국가 운용을 책임져야 할 자유당 정권은 경제재건과 민주화에 대한 비전조차 보여주지 못한 채 부정부패로 얼룩진 시대였다. 전쟁 중에도 부산에서 정치파동을 일으켜 이른바 발췌개헌을 강행한 이승만의 정당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낙후되고 비민주적인 정당정치의 원형을 이룬다. 이승만 개인의 권력을 합리화시켜주는 영구집권 수단으로 급조된 자유당은 법을 초월한 시녀기구였고 정상모리배들이 들끓던 조직이었다. 북한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자유민주주의’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실현에 역행하는 길로 가고 있었다. 원색적인 백색독재를 끌어간 기제는 어린 학생에서부터 공무원, 시민, 노동자들이 각종 궐기대회에 동원되어 외친 ‘북진통일’과 ‘반공반일’이었다. 비현실적인 ‘북진통일론’의 정치적 함의는 통일을 지향했다기보다 남북한의 적대적 대결론에 편승하여 대내적으로 독재를 합리화하고 분단체제를 공고히 하는 논리였고 북한이 우세한 상황에서 남한의 공세적 방어논리이기도 했다.

지금은 통일, 또는 남북문제를 거론할 때 누구나 ‘평화통일’을 상식적으로 말하지만 1950년대만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문제였다. 이승만정권에 의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북한정권을 현실적 실체로 인정하고 남북당국자가 마주 앉아 현안을 풀라는 극히 상식적인 제안이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 지역통합정책을 강조한 이 시기 미국의 아시아정책 기저와 괴리되는데도 이승만 정권이 반일캠페인을 편 이유도 ‘북진통일론’과 같은 정치적 효과를 기대하기 위한 측면이 컸다. 구보타 망언 등 한·일회담에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일본측 자세도 계기가 되었지만 친일파정권이라는 점을 은폐하는 상징조작의 측면과 함께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세대의 강렬한 반일감정을 독재체제 합리화에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의 일이었으니까 이제 꼭 40돌을 맞게 되는 4·19는 1950년대의 이러한 질곡을 풀어가기 위한 서막이었고 한국현대사에서 기나긴 민주화 장정의 서막을 연 것이었다. 4·19가 제기한 과제는 이제서야 겨우 싹을 내밀 만큼 어려운 길을 걸어오기도 했다. 휴전 후 7년도 지나지 않은 때에 일어난 4·19가 폭발한 일차적인 계기는 1957년을 고비로 미국의 정책이 바뀌면서 원조가 격감하자 공장 가동이 위축되고 실업자가 속출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제4대 정부통령선거(1960.3.15)에서 원색적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를 자유당 정권이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로 몰아간 몰상식함에서 비롯되었다. 학생들이 이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지만 사망희생자 186명 가운데 초등학생을 포함한 학생층(77명)보다 하층노동자나 무직자(94명)가 훨씬 많아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국민주권주의의 회복과 평화통일론을 제기한 범사회적 민주화 운동이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생산적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원초적이고 극우적 메카시즘이 득세하던 시절에 어렵게 일어난 4·19는 지도부의 인적 구성이나 정책 면에서 자유당과 다를 바 없는 민주당 정권을 낳는 한계를 안고 있었고 그 후 9개월만에 5·16 군사쿠테타에 의해 무너졌다.

이후 평화통일과 민주화라는 역사적 과제는 1960∼70년대의 기나긴 유신독재시대를 거쳐 1980년의 민주화운동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쿠테타에 의해 무너진 지난 세기말까지 어둡고 험한 터널을 지나야 했다.

식민지시대 이후 한국근현대사를 되돌아 볼 때 사회운동이 미약하던 시절, 학생운동은 그 시대에 불온분자였고 빨갱이로 내몰림을 당했지만 희망의 등불이었다. 오늘날 이 정도나마 민주화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게 된 것도 긴 세월의 대가를 치렀지만 그들의 몫이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나와 뒷세대를 위해 진정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활보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무임승차만 하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의 발전은 더디고 낙후되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수준은, 어중간한 형태이지만 1997년말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변화를 겪었고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이라는 신선한 첫경험도 이번 총선에서야 비로소 선을 보게 될 만큼 아주 낮은 단계에 있다. 이제 6월 중순으로 계획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성과를 거두더라도 이 또한 반세기 이상을 끈 민족의 숙제를 푸는 첫 걸음마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젊은층, 특히 요즈음 대학생층의 사고가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역사에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고 심지어 이를 개인주의로 간주하는 천박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회발전의 건전한 사이클을 위해 우려할만한 일이다. 컴퓨터와 같이 기능적인 차원을 넘어 기성세대에게 자극을 주거나 자기 성찰의 계기를 문화적으로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1971년 이후 16년만인 1987년에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경험한 이래 반사회적인 지역감정이 선거판에서 계속 맹위를 떨치는 것도 금년에 이르는 동안 많은 젊은 세대들이 유권자로 성장하여 큰 비율을 차지하기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신하지 못하고 기성세대들에게 휩쓸린 탓도 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시대와 파시스트적 ‘영웅’을 그리는 퇴행적 사조가 틈을 엿보는 것이다.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서구인들이 아시아나 남미를 비하하면서 사용한 ‘개발독재’ 개념을 차용하여 산업화를 위해 박정희시대의 독재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이 아니더라도 경제개발계획은 9개월로 단명한 민주당정부에서 이미 추진되고 있었으며 세계사적으로 볼 때, 패거리주의와 부패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독재체제 하에서 일시적으로 보여준 경제성장이나 민주화가 배제된 경제성장은 결코 뒤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6·25 전쟁에 의한 파괴의 정도가 남한보다 오히려 컸던 북한이 1970년대초까지 보여줬던 높은 경제성장을 지속시키지 못한 이유는 북한을 둘러싼 국제환경 탓도 있지만 민주화를 통한 사회구성원의 에너지 분출구를 열지 못한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남한의 경제도 이제 수십년간 지속된 독재체제에 따른 부패와 낭비, 천민자본주의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활의 가능성이 넓은 것은 세계사에 유례없이 수십년동안 자기 역량을 발휘해 온 민주화 운동과 교육열, 이를 통해 발전한 국민들의 자기 주체성의 실현 욕구, 이를 수용해야 하는 집권세력의 수동적 개혁이 존재한다는 큰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4·19가 오늘의 세대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되짚어 볼 때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에는 공짜나 비약이 없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