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20주년에 즈음하여] 그날의 분노와 좌절이 오늘의 희망이 되기 위하여
[광주민중항쟁 20주년에 즈음하여] 그날의 분노와 좌절이 오늘의 희망이 되기 위하여
  • 이종범 (조선대 교수 / 한국사)
  • 승인 2000.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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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자 한 광주민중항쟁이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에 대해 지금까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많은 진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왜 그러하였으며’, ‘왜 하필이면 광주이었는가’의 문제는 지금도 간단치 않은 질문이다. 더구나 세계적 차원에서의 지식정보사회로의 이행을 경험하는 요즈음에 그러한 질문은 자못 진부하거나 해묵은 것을 들춰낸다는 질시를 받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당대를 정리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자신있게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광주에서 국가폭력이 왜 있었는가? 우리 민족의 대다수는 해방과 분단.전쟁을 겪게 되면서 ‘예속과 독재와 매판’의 강요된 희생을 당하였다. 우리 국민의 여망은 ‘자주와 민주와 자립’이었다. 이것은 1970년대 들어 활발히 일어난 반유신민주화운동과 민중생활권운동이 1979년 10월 부산, 마산에서 집약되어 폭발하였고 그 결과 박정희가 죽음으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12.12 이후 유신체제를 연장하려는 음모가 구체화되면서 민주화세력과의 정면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것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광주도 그 한 곳이다. 유신연장세력은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었던 김대중과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높았던 광주를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광주를 짓밟는 충정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은 분노하였고 ‘무장’의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1980년 5월의 계기는 신군부 중심의 유신체제의 연장음모이었으며 그 객관적 배경은 바로 분단 전쟁 독재의 한국현대사이었다. 그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은 길게는 4월혁명 짧게는 부마민중항쟁을 통하여 축적된 민주화에의 열망과 역량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와 시민은 커다란 사고와 의식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첫째, 국가폭력에 의한 학살과 탄압은 광주와 같은 죽음을 불사한 저항에 부딪칠 것이며 그럴 수 있다는 생각들이 퍼지게 되었다.

둘째, 민주주의정부는 지배기득권층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주체적 각성과 실천에 의하여 쟁취된다는 평범하지만 절실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셋째, 우리 사회에서의 민권과 민생의 침체와 억압은 우리 민족이 처한 민족현실 즉 분단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하였다.
넷째, 세계경제체제에의 예속을 탈피하고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며 특혜와 특권의 재벌중심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확산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실제 경험하게 되었다. 민선민주정부를 향한 6월민주화항쟁에 대하여 권력 측은 굴복하였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는 그 성과였다. 또한 시민사회의 자주적 발전과 건강한 공동체운동, 그리고 민중생활권운동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바탕으로 노동계와 농촌에서의 민중운동이 일어났으며 교육 환경 보건 경제 분야 등의 균형과 정의를 위한 시민운동이 발전하였다. 이와 동시에 민권신장과 민생안정은 민족분단 극복의 문제의식과 결합하였으며 그 결과 민족의 교류와 협력, 나아가 평화를 위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의 귀중한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 사회의 국민통합과 인권 평화, 인간 지혜의 사회건설의 과제를 제기하고 싶다.

첫째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인 항일운동이었듯이, 광주민중항쟁은 광주 독자의 지역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 민주주의운동의 계기적 발전의 산물이었다. 단기적으로 반년 전의 부마민중항쟁의 성과를 견지하고자 한 적극적 대응이 광주에서 ‘무장투쟁’까지 나간 것이다. 따라서 그 평가는 민주주의 운동사에서 역사적 객관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이때 비로소 작금의 치열한 지역 균열과 불신의 현실에서 광주정신이 새로운 민주주의와 국민 통합의 자양-토대가 되는 것이다.

둘째 광주 시민학생의 분노와 저항은 직접적으로 신군부의 학살에 대한 인간적 절규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광주는 우리 역사상에서나 지구상에서 벌어졌던 국가폭력 앞에 희생당한 민중의 경험과 상통한다. 아직도 세대를 넘기면서까지 그 진상은 가려져 있을 뿐 아니라 드러나고도 해당 국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고 있는 사례가 많다. 그런데 광주는 당대에 그 상흔과 희생을 국가가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권력을 창출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광주는 이제 ‘애이불비(哀而不悲)’의 마음으로 도처의 국가폭력의 진상규명에 동참하고 그 희생의 상처와 함께 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하였을 때 광주는 인류의 보편가치인 인권과 평화의 정신으로 승화되며 세계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셋째, 광주시민 학생은 국가의 배반에 대한 회한과 분노와 좌절 속에서 궐기하였다. 그것이 1980년 5월 극단적 상황에서 폭발하였지만 그 뿌리는 깊은 것이었다.

우리 국민은 생산과 소비, 의료와 교육, 그리고 병역과 납세 등의 생활 현장에서 ‘나라는 무엇을 하는가’를 되물었던 경험이 적지 않았다. 또한 차별과 배제를 수반하는 집중화전략은 지역불균형과 산업구조의 왜곡을 가져오면 소외당한 지역민과 종사자들은 ‘무슨 나라가...’라고 분노하고, 식민지현실과 독재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혹은 분단과 전쟁에서 강요당한 상흔을 안고서 ‘이 나라에서...’를 되새기며 좌절하는 경험이 있었다. 상황과 조건이 다르고 강도가 다르며 표현방식이 달랐지만 적지 않은 국민이 국가에 대하여 느꼈던 실망과 분노와 좌절의 경험은 우리 근현대 역사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을 비롯한 자주 민주 자립을 향한 국민적 실천과 열망에 대한 진정한 보상 보답은 우리 국민의 역사와 생활현장에서의 실망과 분노와 좌절을 치유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바로 창조적 민주주의의 구현- 최소한 세습과 상속, 지연 학연 혈연 등의 인연이 아니라 상생(相生)의 경쟁을 미덕으로 하고 정직한 패자(敗者)에 관대한 사회, 국민의 지식 정보 문화의 힘에 키우면서 인간 지혜 사회를 만드는 노력이 시민사회에서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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