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학계에서 '신과학'을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신과학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런데 이 두 시각 모두 이른바 신과학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대체로 과학의 성격 자체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거나, 혹은 요즈음 흔히 신과학이라고 하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지고 있는 내용 가운데 두 가지 이질적인 요소가 뒤섞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 현재 신과학이라고 불리는 활동의 저변에 분명히 구분되어야 할 두 가지 상반된 기류가 흐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과학의 성격을 바로 파악하고 그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는 가운데 현재 수행되는 과학활동에 나타나는 주요 문제점과 그 대안을 제시해보려는 일종의 '메타과학적' 성격의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 그 자체의 성격을 잘못 파악했거나 적어도 의미 있는 과학의 성과와는 명백히 배치되는 내용을 여전히 '과학'의 이름을 걸고 내세워보려는 '의사과학적' 성격의 흐름이다. 신과학 안에 이러한 두 흐름이 있음을 인정할 때, 신과학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은 과학의 성격을 잘못 판단하여 신과학이 지닌 이러한 의사과학적 성격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거나 적어도 오늘의 신과학 속에 이러한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간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반대로 신과학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지닌 사람들은 신과학의 흐름 가운데 현대의 과학활동이 지닌 여러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그 대안을 제시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과오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메타과학인가 의사과학인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다시피 신과학 안에는 고전역학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기계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고, 지나친 환원주의적 과학관과 전문가들의 편협한 과학주의적 사고에 대한 경고가 들어있다. 우리는 이제 한 단계 진전된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 등이 제공하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경직된 고전역학적 사고를 넓혀나가는 동시에 체계이론적 시각과 전체론적 사고를 통해 환원주의적 사고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에 큰 이의(?)가 없으며, 협의의 과학에만 국한되지 않은 좀더 넓은 사물이해 방식에 눈떠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굳이 반대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더구나 생명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이해를 추구하고 지금까지의 개체중심적, 인간중심적 사고를 반성함으로써 위험으로 치닫는 현대 문명의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은 이 시대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신과학의 정신이라 불릴 내용들 속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담겨있으며, 이것이 바로 특히 초기에 신과학 운동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신과학이라 불리는 내용들 가운데에는 설혹 이러한 정신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유추해낼 합리성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는 주장들이 다수 포함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짚어보자면 양자이론을 빙자한 무분별한 환상적 주장, 엔트로피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변용 등 과학 자체에 관련된 편견들을 비롯하여 기괴한 초심리학의 무비판적 수용, '기(氣)' 개념을 임의롭게 해석한 각종 신비주의 난무 등 정당한 과학적 절차를 뛰어넘은 주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대체로 신과학이라는 조류에 편승한 유사과학에 가까운 주장들이라 할 수 있다.
확고한 과학적 논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이러한 또 하나의 흐름이 지니는 특징은 그 주창자들이 과학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결여하고 있거나 적어도 과학의 성격에 대해 적지 않은 편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의 사례로 우리는 고전역학에 대한 이들의 지나친 혐오와 비난을 들 수 있다. 언필칭 이들은 고전역학에 대해 기계적 사고라고 매도하고 있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고전역학 자체에 대한 기본적 이해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거의 모두 라그란지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최소작용의 원리에 의해 설명되는 자연의 오묘한 질서 앞에 지적 전율을 느껴 본 경험도 가져본 일이 없다. 체계적 과학 이해의 관문에 해당하는 이러한 지적 수련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고전 과학에 대한 성토부터 시작하는 데서 이들 사고의 경박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이 지닌 더욱 어이없는 편견은 이러한 과학의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곧 이러한 사고로 굳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법칙적 사고를 이해한다는 것이 곧 법칙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굳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인데, 이는 푸른 채소를 먹으면 얼굴조차 푸른색으로 변하리라고 믿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한때 고전역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보편적 이론인 것으로 믿어지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에조차 고전역학적 사고에 매몰되어 살아가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고전역학이 좁은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하나의 근사 이론임이 명백해진 지금, 어느 누가 이에 매몰되어 기계인간으로 살아가겠는가? 오히려 이러한 혐오의 감정을 부추김으로써 스스로 과학의 이해에서 멀어지는 지적 황폐를 자초할 뿐이다.
비과학적 믿음에 대한 무차별적 수용이 문제
이러한 지적 수련의 부족은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상대주의적 과학관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각종 비과학적 믿음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현상을 낳고 있다.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주장들이 동일한 신빙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이분법적 사고에 해당한다. 그런데 염려스러운 것은 성숙되지 않은 이러한 여러 사조들이 모두 '신과학'이라는 기치 아래 시중에 나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과학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 점에 대해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신과학'이라는 명칭 아래 자행되는 이러한 지적 남용이 신과학이 그동안 제기해온 건전한 비판적 기능조차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상대성이론, 양자이론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환원주의적 과학관이 가지는 편협성은 여전히 우리 지성계의 여러 국면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성급한 물질적 활용과 협소한 전문가적 시각이 주요 정책 결정에 관여하고 있어서, 우리 문명의 앞날은 여전히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과학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이것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값싼 해법의 유혹에 빠질 것이 아니라 먼저 과학 자체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기하는 가운데 이를 바탕으로 과학을 넘어서는 지적 탐색의 지평에 들어서야만 한다.
지적 노력의 투여 없이 문제의 값싼 해법을 외쳐대거나 문제 자체의 존재를 외면하고 좁은 시각 안에만 갇혀있는 것 모두 오늘 우리가 취할 바른 태도는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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