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의 리더십 바뀔때···역사의 시행착오 반복말자
과학은 환경세계에 대한 이해방식···과학의식 갖고 사회운동 할수 있어야
-평소 과학입국을 강조하시는데 그런 측면에서 포항공대를 어떻게 보시는지요과학은 환경세계에 대한 이해방식···과학의식 갖고 사회운동 할수 있어야
산학협동에 있어서 한 기업의 이윤을 교육에 투자한 것은 교육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권력의 관심에 따라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우리민족의 과학에 대한 순수한 동기에 의해 만들어진 대학 아닌가. 짧은 시간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과학적 저력을 나타낸 역사로 본다. 자랑스럽다.
나의 신념 중 하나는 ‘과학입국’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과학을 통하지 않고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 과학입국의 기둥 역할을 매우 잘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학’ 강의 도중에 고등과학원의 과학자의 견해를 예로 드시면서 ‘최한기의 기학이 그리는 우주론이 현대물리학의 우주론과 많은 면에서 일치한다’고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150년 전의 한 사상가의 형이상학적 사상체계에서 나온 우주론이 현대물리학의 우주론과 절대비교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철학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과학자다. 내가 과학입국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다. 그리고 의학과 생리학과 생화학을 공부했다. 예전에, 한국고등과학원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 그 강연 전에 ‘최한기와 유교’라는 책을 김정옥 교수에게 보내준 적이 있다. 최한기의 생각 중에 ‘기가 없으면 시간과 공간도 없다’는 명제가 있다. 최한기로선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는 70년대의 현대물리학에서나 말할 수 있었던 매우 발전된 인식이라고 김정옥 교수가 이야기했던 것이다.
나는 과학이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세계, 즉 Umbelt에 대한 이해방식이라고 본다. 그러한 이해방식이라고 본다면 형이상학적 이해방식과 과학적 이해방식의 그 궁극적 메시지는 통할 수 있다. 적어도 논리적 구조에서는. 즉, 최한기의 메시지에도 현대물리학의 메시지는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여기서 전통을 공부하는 이들의 국수주의적 발언이 유도되어 최한기는 현대물리학자들보다 위대하다는 비약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이기 때문에 논리적 사유구조에 공통성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것을 동일한 차원에서 학문적 성과로 바로 대비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한기가 과학자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과연 그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
최한기의 사고로 우리가 정직하게 접근해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최한기는 기를 말했기 때문에 일체의 초월적인 세계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오늘날 과학자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불일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소립자의 세계를 움직이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느냐. 근세과학의 출발은 Deism(이신론)이다. 이(理)신론은 신을 과학적 입법으로만 본다. 이신론은 한마디로 무신론일 뿐이다. 초월적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은 없다. 무신론은 과학의 출발이며 근대정신의 출발이다. 또 무신론자가 안되면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자가 될 수 없다. 과학자체가 무신론적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이것이 과학정신이고 과학혁명인 것이다. 이 의미를 체화해서 받아들이는 과학자라고 한다면 교회에 나갈 수 없다. 이것은 논리적 불일치다. 최한기에게는 적어도 논리적 일치가 있다. 최한기의 과학적 성과를 논하기 전에 이런 점을 알 필요가 있다. 그는 그의 시대 한국사람들은 꿈도 못 꾸던 이슬람까지 연구한 사람이다. 기독교와 모든 세계의 종교까지 연구해서 그의 결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 한국인의 과학정신이다. 그런데 21세기의 과학자들이 최한기의 문제의식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과학도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나의 논리를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세계다. 그러나 과학적 이법의 세계는 이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과학과 종교의 화해와 대화를 말하는 움직임도 있지 않습니까
웃기는 얘기다. 그런데 빠지게 되면 그런 공부를 하면 할 수록 과학도로부터 멀어진다. 그래서 한국에 진정한 과학자는 안 나오고 과학사기꾼들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간에게서 신앙과 이성의 세계를 완전히 나눌 수는 없다. 이 분리는 기독교 전통의 서양에서 과학적 성과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변용된 이론이다. 신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구원정신을 가르친다면 바로 과학자의 플라스크에서 그런 정신이 나와야 한다. 나는 그런 정신이 과학자의 플라스크를 다루는 손길에서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철저한 과학정신이 없이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만을 이야기한다면 한국인은 영원히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자가 될 수가 없다.
-서구 이원론의 한계와 배경을 말씀하셨는데, 우리 대학 초대 김호길 학장의 저서 제목으로 ‘자연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서구와는 달리 초월적인 세계관과는 거리를 둔 우리나라의 전통적 유학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봐도 되는지요
포항공대에 헌신하신 분 중에 유교전통의 집안 출신들이 많다. 물론 이로 인한 부작용도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영남 유림의 유교전통에서 기독교적인 초월적 논리는 수용될 수 없다.
서구인들의 과학은 기독교에서 나왔다. 갈릴레오는 ‘우주는 수로 이루어진 성경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신론적 언급이다. 과학자는 그런 입법만 연구하면 되고 그 입법의 입법자가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자연에 입법을 해놓은 것을 인간이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과학의 출발이다. 서양은 과학이 기독교에 빚을 지고 있다. 자연과 신이라는 분립적 사고가 고전물리학의 출발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이러한 기독교의 존재가 필요없다. 지금은 한참 달라졌고 돌연변이가 일어나도 한참 일어났다. 이젠 자연의 입법자가 필요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이런 현대의 과학에서 르네상스 초기의 과학관을 가지고 오늘의 과학을 이야기한다. 이게 대부분의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과학도들에게 설교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과학자라 해도 어느 정도 돈이 있고 집안이 좋으면 교회를 다니고, 유학을 간다. 거기서도 교회를 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부시를 지원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과학도가 그리는 꿈이다. 유학가서 그곳에서 교수하는 사람들 99%가 이 카테고리에서 안 벗어난다. 이것이 과연 과학이냐 이 말이다.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가 원폭 터질 때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그런 과학이 우리나라에 있냐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과학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정치의식이 없다. 그게 무슨 과학자냐. 과학자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사회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정말 외롭게 살았다. 이런 고민을 의논할 상대가 우리나라 학계엔 없었다. 최한기가 말하는 기학은 바로 과학에서 종교정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지적인 일관성도 철학정신이 아니라 과학정신에서 나온다. 서양에서 칸트는 이성의 범위 내에서만 종교를 논했다. 칸트만 해도 이신론적인 확신을 가지고 썼지만 두들겨 맞았다. 이것이 칸트의 불행이기도 하다. 나는 비록 동양철학자이지만 칸트의 실천이성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지적인 결벽성·정직성을 인정하고 이것을 배웠다. 하지만 서구는 여전히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고 칸트와 같은 학자는 매우 소수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우리는 그런 압박을 받을 하등의 전통적인 중압이 없다. 위대한 전통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태어났나. 그런데 그런 위압과 중압을 왜 자처하고 있나. 끼딜로프의 악령에서처럼 머리 위에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스스로 매달아놓는 형국이다. 서양에는 데리다의 해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체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고 잘못 부과된 것만을 걷어내기만 하면 된다. 안경의 습기를 닦는 것처럼 닦아내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해체는 그런 식이다. 데리다의 해체까지 필요없다.
-그럼 이런 현실을 과학자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당연하다. 헌재가 내린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 위헌판결을 비판한 나의 글에 대해 법과대학 학생들이 대부분 동의한다. 그런데 그 학생들은 아무 말도 안 한다. 고시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포항공대생들에게 그런 불이익이 있는가. 그런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사회의식을 가지길 거부하고 사회운동을 하지 않는 것인가. 과학의식을 가지고도 사회운동을 하면서 역사겷또?문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80년대 과학사상운동을 했던 신과학운동회에 참여하신 바도 있는데, 그렇다면 카프라가 주도하는 것과 같은 신과학운동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프리초프 카프라, 그의 이야기가 크게 틀린 것은 없다. 카프라의 고민은 과학자로서도 철학자로서도 별볼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는 계몽적 역할을 했고 나도 감명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들의 로맨티시즘의 수준을 넘는다. 카프라의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다. 그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류의 움직임을 우리가 신과학운동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신과학이라는 말은 필요 없다. 과학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원광대에서 한의학을 공부했지만, 난 거기서 순수하게 서양의학을 배웠다. 유전학, 면역학, 기생충학의 대가들로부터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서 정통과학을 배우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우리는 메이저로 붙어야 한다. 그런데 다들 마이너를 자처하려고 한다. 이것은 이상하고도 잘못된 유행이다. 세계최고 본령의 과학자가 되겠다는 각오를 가져라.
-이와 같은 생각의 조류에 동감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과학자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나는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젊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말이다. 젊은 이공계인들 중엔 이런 나의 생각을 존중해 주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나서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 과학계의 리더십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 포항공대신문사와의 인터뷰도 그래서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라면 안 한다. 포항공대 학생들, 젊은 과학도들이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고 진정한 과학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과학입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렇게 외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강한 인문주의 전통으로 우리 사회엔 과학에 대해 적대적 혹은 부정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인문주의 전통을 잘못 이해해 왔다. 인문주의 전통을 마치 예, 의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데, 예치가 아니라 인치다.
우리의 인문주의 전통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자는 것이지 제도, 예나 덕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자를 예와 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공자는 예와 덕을 말한 적이 없다. 지렁이를 밟았을 때 가슴이 아픈 것, 뭉클한 것, 그것이 인이다. 그것을 심미적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인이다. 그는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심미적 감수성인 인에서 나오는 도덕만을 이야기했다. 예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공자가 예를 관장하는 관직에 있을 때, 제례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 자리에서 예법을 묻기만 하자 그 자리의 사람들이 공자가 과연 예에 밝다고 알려진 자가 맞는 것인지 비난했다. 그러나 공자는 이에 ‘예란 바로 묻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도 과학정신이 부족한 것이다. 과학정신이 투철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내가 전통을 공부하는 것은 전통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통을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내가 60년대부터 홀로 생각해 온 것이다. 이로 인한 고뇌도 사실 매우 컸다.
개화한 개신교 집안에서 동양철학을 한다는 것은 황당한 일로 비쳐졌다. 혼자 공부하면서 나의 길에 대한 공포감도 느껴보았다.
-예전에 장회익·소광섭 교수들과 같이 행동을 하신적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분들과 사상적으로 일치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분들은 모두 나름의 전문가다. 과학적 지식이 확고한 그분들에게 많이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배웠다. 나는 포괄적 세계관 즉, 코스몰로지를 구성하는 측면에 있어서 다양한 맛을 본 정도가 아니라 전문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그들이 포괄적인 전문지식인으로서는 부족할 수 있지 않을까.
전통을 과도하게 과학에 결부시키는 면이 있다. 봉한소체에 의해서 한의학이 미래가 열릴 것이라 보지 않는다. 과학이라는 것은 가설을 세워서 이것을 입증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 가설 자체가 바른 가설인가를 검증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상식적인 코스몰로지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중요하다.
한의학 경락의 문제에서 경락이 어떤 식으로든 측정 가능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물리적인 사실로서 풀릴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뭔가 독특한 차원의 새로운 가설방식과 새로운 입증방식이 필요하다. 분명한 증후는 있는데 그 기능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런데 그런 과학은 없다. 현재 말해지는 엄밀한 의미의 과학에는 이것이 없다. 그 문제에 대해선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면 권도원 선생과 같은 한의학 연구 움직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권도원 선생 주변의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빠져있다. 그런 환경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가 없다. 안타깝다. 한의학 연구의 주요문제는 항상 곡해되고 있다. 그런 환경이 한의과 학생들을 돌팔이로 만드는데 기여 중이다.
-예전에 공자가 오늘날 태어났다면 그는 째즈 뮤지션이 되었을 것이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한기가 오늘날 태어났다면 어떤 인물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째즈는 즉흥성, 즉발성의 음악이다. 우리 관료사회에는 즉발성이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사회를 가장 좀먹고 있는 것 중 하나다. 공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즉발성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이런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만들어왔다. 이것은 문제다. 뷰로크라시(관료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즉발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자를 이렇게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논어를 도덕규범집처럼 읽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논어는 규범이 아니라 순간적인 생각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논어처럼 살아있는 즉발적인 대화를 모아놓은 책이 없다.
최한기가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면, 많은 경우 아마 두 개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나쁘게 흘렀다면, 몽상적 이론가가 되었을 수 있고, 잘 풀렸으면 아주 통학적인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최한기라는 인간은 굉장히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읽고 쓰고 주절거리고... 시적인 사람이 아니고 산문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인생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당대의 지식인으로서는 매우 열려있는 사람이었다.
오늘날 태어난다고 해도 나쁜놈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지식인들엔 나쁜놈들이 많다. 나쁜놈들은 지식을 가지고 나쁜짓을 한다. 최한기는 지식에 대한 총체적 포괄적 integrity가 있다. integrity에는 정직이라는 의미도 있다.
-우리 과학계는 노벨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을 하나의 기술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술과 과학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은 의식을 가진 생명체들이 생존을 위해 동원하는 삶의 수단이다. 낙농업 같은 것이 기술이다. 과학과 무관하게 인간의 삶의 기술로서 나온 것이다.
과학은 여기에 수학과 같은 연역적 논리체계를 추가한 것이다. 과학의 시작은 경험과학이 아니라 희랍인들의 논리적 사유가 과학의 시작이다. 르네상스로부터 경험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통해서 기술과 과학의 랑데뷰가 일어났다.
기술과 과학의 랑데뷰가 이뤄지면서 인간의 삶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가장 주요한 선물로 얻은 것은 민주주의이다.
데모크라시는 희랍에 없었다. 희랍의 데모크라시는 다른 의미다. 현재의 것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세상이라고 하는 것도 과학이 만든 것이지 철학이 만든 것이 아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생산기술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전기를 생각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이것은 철학이 한 것이 아니다.
모든 정치·경제·사회변화가 과학으로부터 일어난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은 과학에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과학기술시대에 과학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과학과 기술이라고 하는 것이 독자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의 밀착되어 있다. 과학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이 다시 과학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포항공대 가속기의 예를 보라. 과학과 기술은 상호보완관계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이러한 과학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이 인간사회를 선하게만 할 것인가 하는 낙관적 믿음자체가 위태로운 것이다.
유전공학에 대해선 나는 물론 반대다. 생명현상을 공학적으로 조작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무리가 따른다. 그런 문제를 생각하면 나는 니힐리스트가 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나는 불안감만 가지고 있지 나의 영역은 아니다. 과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책임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노력은 필요하다. 이것은 상황윤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규범윤리는 없다. 상황윤리는 기본적인 전제는 가지고 있되 세부적인 윤리는 상황에 맞춰가는 것이다. 상황윤리는 굉장히 추상적인 전제, 보편적인 인간을 위한 선과 같은 전제를 깔고 나머지는 상황적 맥락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칸트의 명제가 바로 이와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이런 보편적인 윤리의식은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사회를 변혁시킨다는 관점에서 인터넷의 발달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예전엔 난 신문매체 등에 글도 실을 수 없었다. 지하는 꿈틀거리고 있다. 젊은이들의 세계다. 이러한 지하를 나와 연결시켜주는 것이 오마이뉴스와 같은 인터넷 매체다. 이전에 나는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는 즉, 맑시스트도 아니라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흐름은 지식의 빈곤을 낳는다.
인터넷의 세계는 기존의 가치관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여태껏 정보를 독점했던 세력들에게 이토록 큰 충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 없다. 정보화에 따른 부작용이 있다고 하나 나는 우리 사회의 민주는 인터넷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신문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것도 우연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인터넷 인프라가 깔리게 됐는데 이게 민주로 연결된다. 역사는 이렇게 우연적인 것이다. 이처럼 우연에 의해 흘러가는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왜 언론과 싸우는가. 이렇게 하면 한겨레, 조중동으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모든 언론매체가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보도를 하지 않고, either or라는 두 연역적 전제로서만의 의사정보를 전달하게 되고 우리나라 정보문화의 전체적인 하락이 오게 된다. 이건 과학적 비판이다.
조중동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힘을 못쓰는 세계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된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건 코드가 아니다. 나는 그런 수준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한나라당도 옳은 얘기를 한다면 밀어준다. 이게 과학이다. 이것이 우리사회 문제다. 예전에 내가 80년대 대학가에서 강의할 때 전두환을 존경하라고 얘기했다. 전두환처럼 이렇게 확실하게 우리사회 악을 구현하는 사람이 없다. 이 덕분에 너희들이 민주의식을 갖게되지 않았나. 지금 노무현 대통령은 정반대다. 완전히 바보노릇을 해서, 우리가 도와주려고 한다. 과거에는 너무 억압해서 민중을 계몽시켰고, 지금은 너무 억압하지 않아서 민중이 알아서 계몽되도록 한다.
난 완벽한 컴맹이다. 난 이 시대의 완벽한 골동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집엔 골동품이 없다. 내가 골동품이니까.
컴퓨터 매체라는 이유로 인터넷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 소통되는 정보는 매우 표피적이고 깊이가 없을 수 있지만 나같은 사람까지 그곳으로 몰리게 한다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이런 체제하에서 종이신문으로서 제대로된 신문이 어렵다. 한겨레도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신문이 나올 환경이 아니라면 인터넷 매체라도 이용해서 역사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이끌어나가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단 인터넷 문화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생각을 좀 더 깊이해줬으면 좋겠다.
-과학을 하는 사람과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소통·교류의 장이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이전에도 포항공대에 그러한 역할을 하는 철학과 언어학과를 만들자고 김호길 학장에게 제안한 적이 있다. 그 뒤론 이야기가 없었다.
프린스턴의 고등과학원과 같은 데에는 과학자, 인문학자 모두가 다 들어가 있다. 이런 것을 만들면 어떻겠는가 이런 제안을 나는 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이것을 과감하게 실현하지 못했다. 서양 역사의 위대한 발전들은 그 시대의 상식에 맞지 않더라도 이것을 과감하게 밀어붙여서 이루어졌는데 우리나라엔 그런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난 누구보다도 과학과 인문학의 교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과학도들이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철학이 있어야 되고 아무리 어려운 과학이라고 하더라도 그 과학적 성과의 사회적 의미를 쉽게 풀어서 써야 한다. 그런 과학적 언어의 해체가 필요하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것이 과학자에게 의무화되어 있다. 그런 기금이 따로 있다. 과학자의 의무가 과학적 성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과 소통되어야 한다. 나는 시간이 나면 인문학자들보다는 과학자들과, 특히 젊은 과학자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새롭고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그들은 과학이 너무 재밌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이 재밌기까지는 너무 어렵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언어의 해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최수운 선생이 ‘내 도는 쉬운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유럽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어떻게 하면 말을 어렵게 할까만 고민한다. 이것은 헤겔로부터 데리다까지 이어지는 전통이다. 예를 들어 ‘소양인은 화가 많다.’ 이런 말을 어디가서 얘길해서 유럽의 지식인들이 알아들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유명한 사상가도 이해하지 못한다. 헤겔과 데리다까지의 전통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알고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괜히 어렵게 한다. 학문이 잘못되어 왔다. 21세기의 인터넷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의 본질적인 해체가 일어나고 있다. 난 이것이 좋다. 영화만 보면서도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가벼움이 기초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부족으로 인해서 위험할 수 있지만 예전의 억압적인 강요에서 우리 젊은이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21세기다.
-과거를 보면 과학을 과학답게 한 것은 인문학자와 과학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소통단절은 현대과학이 전문화되면서 이루어진 최근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포항공대에도 제대로 된 인문학 개론강좌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중앙대에서 강의할 때 수강생의 80%가 이공계였다. 이것은 이공계인들의 지적 갈증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마디 당부할 점은 인터넷만 하지 말고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이공계에 진학해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나는 학생들이나 교수들이나 모두 기초과학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초과학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모두 통합적, 공통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문과생이든 이과생이든 기초과학을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방향으로 교육체계가 나아가야 한다. 학부제라든가 현재의 제도적인 문제 때문에 이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안타깝다. 대학이 상업화되어가고 있다. 대학은 회사가 아니다. 대학은 인풋 아웃풋으로 계산되는 곳이 아니다. 중앙일보의 대학평가와 같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기독교의 대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우찌모라 칸조라는 사람이 전쟁발발 상황에서 네명의 학생이 찾아와서 우리가 지금 한 것 같은 얘기를 했다. 그들 전부가 대학총장이 되었고 일본의 정신을 일깨워나갔다. 나는 나를 찾아온 여러분들이 우리나라 교육개혁을 리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나는 현실적인 많은 문제에 있어서 니힐리스트지만 기본적인 신념과 수학적 이성을 잃은 적이 없다. 여러분들은 그러나 치열한 정신을 가지고 속지 말고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가라. 목표는 가변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항상 그 목표에 대해서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여러분들의 나이대에 최소한 엉덩이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공부했다. 노력하고 한시간이라도 낭비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이 미래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열심히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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