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과학자이면서 철저한 유가적 휴머니스트
[기획특집] 과학자이면서 철저한 유가적 휴머니스트
  • ※조순 전 부총리가 김호길 박사 평전에 실은글을 요
  • 승인 2004.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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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길 박사는 탁월한 과학자였다. 그는 소시 때부터 과학자로 입신하고자 했고, 보통 과학자가 가지지 않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공과대학을 한국에 만들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공과대학을 개선하는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공과대학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천신만고 끝에 포황공과대학을 설립함으로써, 끝내 그의 꿈을 이루었다. 그는 과학자, 교육자로서의 이름을 천하에 날렸고,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였다. 그는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보다도 성공한 과학자일 것이다.

김호길 박사는 과학자인 동시에 철두철미한 유자였다. 그는 유교적인 인본주의의 가치관을 가지고 학문을 하고, 일상생활을 했다. 그는 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 진수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천했다. 그는 그가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유림의 조직인 박약회(博約會)를 창시하여, 스스로 떠맡은 유자로서의 임무를 다 했다.

이 두 가지 임무 -세계적인 공과대학의 설립과 유교적 인본주의의 가치관의 부흥- 는 그가 스스로 갚기로 작정한 빚이었지, 남이 억지로 맡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60세의 짧은 생애를 통하여, 이 두 가지 빚을 다 갚고 세상을 떠났다. 좀더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크지만, 그는 이 시대에 누구보다도 성공한 유자였다.

김호길 박사는 안동의 유서 있는 유가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유자의 덕목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의 타고난 호걸기질이 유가의 교양을 받음으로써, 마음에 균형과 중용을 갖추고, 당연히 국가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는 ‘지사인인(志士仁人)’이 된 것이다. 유자로서의 마음가짐과 군자로서의 처세의 기본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비록 소학이나 논어의 암송에는 짧았지만, 그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유자였다.

그는 유자로서의 그의 가치관을 비판하는 어떤 선배과학자에게 “과학도 인간이 하는 겁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가 가지는 유자로서의 기치관의 중요성을 주장한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는 과학자이면서도, 철저한 유가적 휴머니스트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타고난 바탕을 빛나게 하였다.

김호길 박사는 단순한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합리적인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우선 경남북 중심으로 유가의 후예들이나 유학에 관심 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유교의 정신을 살리고, 친목도 도모하기 위하여, 논어의 ‘박약이문 약지이례(博學以文 約之以禮)’를 딴 ‘博約會’라는 일종의 유자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그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여, 엄청나게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의 발전에 헌신하였다.

그는 과학기술을 위해서는 포항공대를, 유교를 위해서는 박약회를 창시하는 희대의 업적을 남겼다. 이 점에서 그는 바로 유교적 과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김호길 박사는 포항에서 박태준 회장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어, 그는 드디어, 평생의 소원인 세계적인 공과대학의 설립에 성공했다. 포항공대에는 그가 평소 잘 알았던 우수한 재미 과학자들이 많이 초빙되었고, 또 동양근대사로 미국에 학명이 높았던 김기혁 교수, 그리고 한학 및 퇴계 연구에 조예가 깊은 권오봉 교수 등도 초빙되어, 포항공대는 김 박사의 평생의 포부가 포항공대에서 실현되었다.

10년 전 1994년 4월 30일, 김호길 박사는 졸지에 세상을 떠났지만 포항공대에서의 그의 찬란한 업적과 그 뒤에 숨은 신고와 노력은 길이 우리역사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