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여덟 오름돌] “누가 과학한국의 미래를 묻거든…”
[일흔여덟 오름돌] “누가 과학한국의 미래를 묻거든…”
  • 백정현 기자
  • 승인 2000.09.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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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는 동쪽을 향하여 먼 장정을 이룩한 조상들의 끈기와 진취적 태도로 자연탐구에 임할 것이며, 금속활자와 거북선을 만들었던 창위성으로 기술발전에 임할 것입니다…”

86년 초대학장이었던 고 김호길 학장의 개교기념사의 일부분이다. 포항제철의 재력을 배경으로 계획되고,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우리 나라의 석학들을 교수로 초빙하는 등의 사건들로 인해 이미 개교 이전부터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포항공대가 짧은 20세기의 역사를 보내고 새천년을 향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제 2학술정보관 건립 등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들 뿐만 아니라, 그 내실에 있어서도 여전히 세계적으로 수준급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 혹 포항공대의 절정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쓸데없는 기우일까?

군 제대후 복학한 후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내가 정작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네들이 걱정하는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졸업 후 진학보다는 좋은 직장에 취업을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 심지어는 변리사 등의 고시를 준비하면서 학과 공부는 뒷전으로 하는 ‘분위기’, 군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에게 진학보다는 취직을 권유하는 ‘분위기’, 과학과 국가와 미래를 생각하는 포항공대라는 말이 가끔 농담삼아 입에 오르내리는 ‘분위기’…. 서울의 다른 대학들을 뒷전으로 하고 이 포항에 내려오게 한 이 학교의 매력, 내가 선배들에게 배워왔고 후배들에게 얘기해왔던 이 학교의 건학이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는 후배들을 찾아보기 위한 지난 한학기는 헛수고로 지나가버렸다.

우리 학교 출신의 우리 학교 대학원 진학비율은 5년전에 비해 크게 떨어져 있다는 것은 굳이 통계수치를 들먹이지 않아도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사실이다. 대학원 중심대학이라는 명패가 빛바래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이 학생들을 직장으로, 자격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인가.

기업에는 기업이념이 있고, 전 사원은 그 기업이념을 향해 매진한다. 마찬가지로 포항공대에는 건학이념이라는 것이 있다. 이 학교의 설립자들이 번화한 서울의 대학로도 아닌 포항땅의 거친 황무지를 개간하여 어렵게 학교를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지역주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정원을 3백명으로 제한하면서 철저하게 소수정예의 모토를 지향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취직율 100%가 아닌 우수한 과학자, 엔지니어를 양성하겠다는 목적 하나만을 가지고 세운 이 학교의 건학이념을 물어보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가야만 하는 것인가? 높은 곳에서 각종 현안과 씨름하고 계실, 혹은 학교정책에 가장 깊이 개입하고 있을 교수님이나 직원들에게 물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인가? 우리 학교의 건학이념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란 말인가? ‘과학과 국가와 미래를 생각하는’이라는 말이 단지 식권이나 종이컵에 넣을 문구가 없어서, 혹은 입시생들에게 홍보하기 위해서 짜낸 말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항상 다짐하고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 학교의 건학이념이 아닌가!

같이 3년을 보낸 뒤 대학원에 진학하고 지금은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친구가 신입생 당시 서울대에 대한 매력을 느꼈던 문구가 있다고 한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하라’라는 말이 입시생 당시에는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고인물이 되지 않고, 학벌보다는 실력으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먼 포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만약 누가 우리에게 과학한국의 미래를 묻는다면 우린 어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도서관 앞 빈 좌대를 떳떳하게 가리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땅에 이 학교를 만들어 우리에게 나아갈 바를 제시해 주었던 설립자들의 뜻을 기리는 마음만이라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포항공대에 입학한 학생들의 의무이며, 혜택받은 사람들로서 보답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포항공대 천 이백여 명의 학우는 미래 세계적 과학전쟁을 준비하는 일당백의 전투원이다. 향후 10년을 계획하는 ‘포항공대 마스터플랜’의 첫부분은 학생들의 새로운 다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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