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 기고] 창의력 북돋는 열린 교육을 위하여
[동문 기고] 창의력 북돋는 열린 교육을 위하여
  • 승인 2000.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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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내가 받는 중고등학교 교육이 무척 못마땅했다. 한 교실에 60∼70명이나 되는 애들을 몰아넣고, 뭔가 다른 답을 하면, ‘왜 그건 안 되는가’ 보다는 ‘틀린’ 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에 급급한 여러 상황들이 더욱 그랬다. 그리고는 언제부터인가 ‘창의력’이라는 단어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아인슈타인을 동경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한 사물간의 관계, 연결고리를 그는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사물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을까? 벌판에서 우물을 만들 때 별 생각없이 주변을 열심히 파다보니 운이 좋아서 수원이 발견된 것처럼 그도 상대성 이론에 관한 생각을 우연히 하게 된걸까? 아니면 순전히 그의 천재성 때문일까? 나는‘한 우물만 파라’라는 속담을 계속 들으면서, 사람이 한가지만 잘해야지 이것저것 다 잘 할 수 없다는 세뇌를 당하면서 자랐다. 한번 ‘과’가 정해지면 나중에 과를 바꾸는 것이나 휴학하는 것조차 많은 압력을 주는 사회에서 자란 탓인지, 바이얼린도 꽤 잘 켰다는 아인슈타인, 사회운동에 관심이 커서 글도 썼다는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 철학적 글들을 많이 쓴 수학자 버트란드 러셀, 취미로 과학을 했다는 흔적을 유감없이 보여준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천재성과 함께 다른 재능도 부여받은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연구하는 남편 덕에 그의 유럽과 미국의 친구나 손님들에게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음식 차리는 것이 부인의 주임무가 아닌, 그리고 부부가 함께 초대되는 서양의 문화가 배경이었던 것은 그쪽 문화를 좀더 배우고 싶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서 여러가지 경험이 좀더 쌓이면서, 나는 연구자가 가진 세계관이나 철학에 의해 연구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 예는 과학분야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세상은 유리수와 정수로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자의 증명에도 불구하고 무리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버트란드 러셀을 비롯한 여러 수학자들이 수학의 기반인 공리들의 참을 증명하려 한 시도들도 수학은 완벽한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던 그들의 철학 때문이었다. (물론 진화론이나 상대성이론 등 과학의 결과들이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과 철학을 바꾼 것도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은 바이얼린을 켜고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상대성’에 관한 이해를 더욱 심화하면서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통일장 이론의 연구방향을 잡아갔을 것이고, 촘스키는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언어학 연구의 방향감각을 얻었을 것이다. 미술을 위해 사물을 관찰하면서 다빈치는 논리적이고 정확하게 사물을 묘사하는 법과 더 나아가서 사물들의 원리들을 배웠을 것이고, 삶과 가치관에 대한 생각이 러셀로 하여금 수학적 논리의 일관성과 아름다움을 더욱 추구하도록 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들, 사람들에게 알려진 업적에 관한 부분의 결과가 그들의 철학과 세계관에 영향을 준 그런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 다시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육환경과 사회환경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어떤 세계관, 어떤 철학을 주입받고 있는가?

아니, 절대적인 ‘관’을 알 수 없는 현실에서 이런 질문보다는 세상에 널려있는 여러가지 ‘관’들을 비판적인 자세로 수용하기 위해, 세상에 널려있는 여러가지 ‘관’들을 비판적인 자세로 수용하기 위해, 나아가서 좀더 나은 ‘관’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에 대한 ‘우리는 사물을 다른 여러 관점에서 보도록 유도되고 있는가?’ 란 질문이 더 적합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전문분야 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 영감을 줄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 것일까? 혹시 하나의 특정분야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의 가능성을 막는 것은 아닐까?

이런 면에서 나는 포항공대가 사람들이 가진 ‘좋은 대학은 서울에 있어야’ 라는 고정관념에 대항하여 서울과 먼 곳에 세워진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대학원생들을 뽑을 때 어느 특정대학들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학들로 선택의 범위를 넓힌 것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한다.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엔 대학원생들의 출신학교가 보통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위 일류대 일색이 아니라는 것이 어린 나에겐 일종의 충격이었다. 나중엔 포항공대 사람들이 그런면에서 나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상황을 더 넓고 크게 본 것이었다.)

또, 공과대와 이과대 뿐인 대학의 약점, 즉 현실적으로 남자들이 주류이고, 또 사회과학이나 예술 등의 다른 분야들을 접할 기회가 부족하여 다양한 모습들을 접하기 힘들다는 약점을 극복한다는 면에서, 포항공대의 이화여대와의 교류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몇몇 교수님들이 다른 대학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긍정적이다. 포항공대는 결국 고인 물이기 보다는 흐르는 물이기를 택한거니까. 또 흘러야 새로운 물이 들어오는 법이니까.
한가지 불만이 있다면, 교수진이 대부분 북미의 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학위나 일본의 학위들을 가진 사람들도, 또는 다른 지역의 학위를 가진 사람들도 교수나 연구자, 학생 등의 신분으로 포항공대에 많이 있다면, ‘우린 좀더 다양한 생각을 접하면서, 다양한 ‘관’들을 평하고 비판하고 검토하고 조정하는 법을 배울 기회가 더 많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본다. 깊은 우물을 파려면 넓게 파야한다라는 어떤 이의 말이 포항공대에도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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