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Bush Man)’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들이 있다. 굶주린 자들은 ‘리틀 헝거(Little Hunger)’와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로 나뉜다. 리틀 헝거는 물질에 굶주린 자들이다. 그들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음식이 고프다. 반면, 그레이트 헝거는 의미에 굶주린 자들이다. 그들은 △왜 살아가는지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하루하루의 가치는 어디에 맺히는지에 고픈 자들이다. 부시맨들은 그들 층위의 고픔이 진정한 고픔이라고 여기고 그들을 그레이트 헝거라고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레이트 헝거로 향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삶 속에서 기자가 된다는 것 또한 그레이트 헝거로 향하는 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어떤 기사를 써야 할지 알 수 있다. 의미가 고픈 기자가 돼 의미를 담은 기사를 써야 한다. 저널리즘에서의 의미란, ‘세상과 사람을 잇는 매개로 세상의 변화를 도모하고, 사람의 사유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기사가 비추는 세상 자체가 리틀 헝거적이라면 과연 기사에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이다.
기자가 기사를 쓰는 것은 일종의 ‘팬터마임’이라고 생각한다. 팬터마임은 실제로 부재한 사물이 마치 존재하는 듯 연기하는 극이다. 팬터마임은 단순히 사물이 있는 듯이 연기하는 것을 초월해 부재에서 존재를 낳고, 무의미에서 의미를 낳는 상징으로도 느껴진다. 의미가 고픈 기자라면 분명히, 리틀 헝거적인 세상에서도 팬터마임을 통해 의미를 낳고 그레이트 헝거적인 기사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포항공대신문사의 기자로서 늘 의미에 고파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