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뭇국
소고기뭇국
  • 서종철 / 화학 조교수
  • 승인 2024.01.0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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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 보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소고기뭇국을 끓이게 된다. 때마침 오늘 저녁에도 오색 현미와 카무트를 적당히 넣어서 고슬고슬 지은 잡곡밥과 함께 소고기뭇국을 끓였다. 소고기 양지 국거리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참기름을 두른 냄비에서 살살 볶다가 적당히 익었다 싶으면 얇게 깍둑썰기를 한 무와 표고버섯도 함께 넣고 조금 더 볶는다. 그러다가 다진 마늘, 국간장을 조금 넣고 센 불에서 얼른 버무리다 물을 붓고 팔팔 끓인다. 떠오르는 거품을 가볍게 걷어내고 혹시라도 모자라는 간은 소금으로 약간 해 준 다음 콩나물을 조금 넣고 한소끔 끓이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고기뭇국이 완성된다. 

어렸을 때의 식탁을 떠올리면 항상 이 소고기뭇국의 향과 맛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가끔 올라오던 갈치구이, 몇 종류의 나물과 함께 이 소고기뭇국은 식탁에 도란도란 둘러앉은 이미지,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와 함께 진한 맛과 향으로 어린 시절 내 삶의 풍경 한편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직접 음식을 해 먹는 나이가 돼서도 이 소고기뭇국은 옛날 어머니가 끓이던 걸 어깨너머로 본 방식 그대로 끓이게 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내가 끓인 국은 어릴 때 먹던 그 맛과 뭔가 조금 다르다. 분명 같은 방식 그대로 국을 끓이는데도. 물론 내가 끓인 국이 맛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다섯 살 우리 딸아이도 너무 잘 먹는 국이라 나름 자부한다. 그런데 오랜만에 어머니가 끓인 국을 먹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바로 간장 맛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트에서 사 온 시판 국간장을 쓰는데, 어머니와 할머니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절에서 사 온 메주로 직접 버섯 간장을 담가서 음식에 쓰고 계셨다. 어린 시절 느꼈던 맛과 향은, 소고기의 풍미, 부드러운 무의 식감과 함께 우리 집의 문화로 자리 잡은 간장으로 완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교수가 돼 학생들과 함께 실험실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과거 내 경험 속의 두 가지는 꼭 내 실험실에도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첫째는 연구의 자유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내 박사 지도교수님과 같은 철학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싶다는 것이고, 둘째는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재직했던 독일 베를린 프리츠 하버 연구소에서 경험한 수평적 연구 문화를 실험실에 안착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보니, 그래도 나름 내가 원하는 대로 실험실 문화가 자리 잡아가는 것 같긴 하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좀 맛이 다르다. 연구의 자유도를 보장하며 학생들을 지도하고자 하면서도 가끔은 스스로 조급함에 쫓겨 학생들을 닦달하게 되기도 하고, 수평적인 실험실 분위기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소고기뭇국을 끓이듯 기억을 더듬어 실험실을 꾸렸지만 내가 기대한 맛과는 뭔가 다른 맛이 난다. 어머니의 간장처럼 내가 간장을 담글 수 없듯, 내 지도교수님과 완전 똑같이 지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이곳은 막스 플랑크 연구소와는 다르기에 내가 생각하고 경험한 맛 그대로 실험실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나는 이제 음식을 먹는 상황이 아니라 국을 끓이는 사람, 즉 실험실을 꾸리는 연구책임자가 됐다.

과거의 경험은 그때 그 시간, 그 공간이었기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비록 그 맛이 조금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 특별함에 녹아 있는 좋은 기억들과 분위기를 지금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이 공간에 옮겨 담고 싶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기왕 그럴 거면 새롭게 옮겨 담은 맛이, 맛보는 사람 입장에서 좋은 맛으로 기억될 수 있으면 한다. 다섯 살 우리 딸에게 소고기뭇국은 할머니의 맛이 아닌 아빠의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내 기억 속 내 어린 시절의 맛과는 다른 새로운 맛으로. 적어도 나는 내 딸에게 소고기뭇국 맛이 참 따뜻하고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험실에서도 그랬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 실험실을 거쳐 간 학생들에게 학창시절의 기억이 텁텁하지 않은, 깔끔하게 맛있고 시원한 소고기뭇국 같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계속 국의 맛을 보며 간은 맞는지 스스로를 성찰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밥 한 공기를 뚝딱 다 비웠다. 이제 깨끗하게 비운 국그릇 설거지를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