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로잡는 과학적인 방법
세상을 바로잡는 과학적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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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27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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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가 판치는 이 세상에 우울해져 갈 때면, 나는 언젠가 진실을 보증하는 엄밀한 과학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본다. 일찍이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류가 없는 총체적인 추론체계인 ‘보편과학’을 구성하는 것이라 믿었다. 오직 하나의 명료한 의미만을 가지는 보편기호와 이들을 타당하게 조합하는 보편법칙들. 이들로 이 현실 세계와 언어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옳고 그름은 단지 이 체계를 분석하는 기계적인 일로 깔끔하게 환원된다. 이제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있을 때면 우리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누가 옳은지 한번 계산해보자!” 

라이프니츠의 이 담대한 기획은 생전에 진전을 보지 못했지만, 그 후계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역사 속에 부활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은 그가 꿈꾸었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예상치 못한 세계의 기이한 진실 앞에 이러한 도전들은 번번이 좌절돼 왔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웬일인지 자연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들은 깊어져만 가고, 인간이 지닌 지능과 의식의 실체는 여전히 안개 속에 머물러 있다. 또한, 우리가 판단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은 사회적 맥락하에서만 해석이 가능한 미묘하고 모호한 형태로 남아있고, 이들을 계산하는 데 사용돼야할 최첨단 기계들마저도 편견과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으나, 라이프니츠의 꿈은 오히려 더 멀어진 것만 같다. 

완전한 객관화와 체계화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자 했던 보편과학의 시도들은 오히려 이를 벗어나는 과학의 본질을 더 분명히 드러내 줬다. 계산으로 대체 가능할 것이라 믿었던 과학이 실제로는 체계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인격적이고 공동체적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이 활동에는 필연적으로 매순간 개인의 신념과 양심에 따른 판단이 관여하기에, 과학적 결론은 연구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종종 같은 결과마저도 관점에 따라 다른 판단으로 귀결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중이 가진 통속적인 이해와는 달리, 과학은 끊임없는 논쟁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이 가진 불확실성과 오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면, 그것은 과학자들의 뛰어난 창의력만큼이나 이를 뒷받침 해주는 수준 높은 공동체, 즉 마치 거대한 기계처럼 굴러가는 무대의 뒤에서 신념과 양심을 가지고 최선의 판단을 수행하며 헌신하는 구성원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가장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이는 과학 활동이 기계화될 수 없다면, 우리 사회, 우리 경제, 그리고 우리 정치의 문제들이 말끔하게 기계화되어 계산되는 날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과학도, 세상도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부조리와 끊임없는 실패의 위험 속에서 놀랍게도 세상이 유지되는 이유는, 책임감있게 관여하며 저항하고 또 희생하는 인격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계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이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위로한다. 객관화된 세계가 보여주는 차가운 합리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 가려진 인격적인 실재를 인식하고 그 열정적인 모험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로잡는 과학적인 방법이 아닐까?  

최근 벌어지고 있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과학계 카르텔 논란과 예산삭감, 탄소중립과 재생에너지 정책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기술과 관련한 모든 문제는 단지 과학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정치-경제적 맥락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이 문제의 결과들은 어떤 경로로든 과학기술 공동체와 국가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에 신념과 양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수준 높은 공동체가 절실하다. 이러한 일들을 피하고 자신의 전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면서 세상을 과학으로 바로잡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비과학적인가? 라이프니츠의 ‘보편과학’은 비록 실패하고 그가 꿈꾸는 세상은 오지 않았지만, 그 시도가 존경할 만한 과학적 기획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