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뼈
말과 뼈
  • 우정아 / 인문사회학부 부교수
  • 승인 2022.05.02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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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와 돌로 내 뼈를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말로는 나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뼈 때린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어르신들은 혹 ‘골 때린다’의 유의어라고 착각할지 모르나, 골 때리는 일은 어이없는 상황에서 쓰이고, 뼈 때리는 건 지나치게 솔직한 말로 정곡을 찌르는 일. 유의어로 ‘돌직구’와 ‘팩트 폭력’이 있다. 이들은 모두 글자 그대로 말의 폭력성을 가리킨다. 영국 속담도 상대가 아무리 험한 말로 위협하고 야비하게 조롱해도 무시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지, 정말 내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작년 말에 나는 포스텍 문명시민교육원 원장이 됐다. 지난 2019년 개원한 이래, 소설가 김훈을 필두로 △윤태호 △유홍준 △공지영 △은희경 △김기문 △성영철 △정재승 △손숙 △장사익 △승효상 △유현준 △반기문 등 삼척동자도 다 아는 명사들을 초청해 수강 신청을 시작하자마자 국제관 국제회의장이 전석 매진됐다는 포항의 전설, 문명시민강좌가 바로 교육원의 대표 프로그램이다. 그러니 덜컥 일을 맡기는 했으나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고, 무엇보다도 과연 내가 문명 시민이기는 한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문명’하면 세계 4대 문명이 떠오른다. 쐐기문자를 발명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인류 최초의 대서사시 ‘길가메시’를 썼고, 인더스에서는 인류 최초로 목화를 재배했다. 황하 유역에는 5,000년 전에도 비단이 있었고, 이집트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평균 2.5톤짜리 돌덩어리 230만 개를 쌓아 피라미드를 세웠다. 그런데 2.5킬로그램짜리 아령도 버거운 고학력 중년 여성인 내가 어떻게 문명 시민이 될 것인가.

해답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에게서 찾았다. 그녀는 15,000년 전, 대퇴골이 부러졌다 치유된 인골이 바로 문명의 최초 증거라고 했다. 대퇴골은 우리 몸의 2백여 개 뼈 중 가장 큰 허벅다리 뼈다. 이 뼈가 부러졌다 다시 붙으려면 최소 6주가 걸린다. 야생의 세계라면 그 전에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거나, 포식자의 눈을 용케 피하더라도 물과 먹이를 구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대퇴골이 부러졌다가 치유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누군가가 그를 버려두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고 다 나을 때까지 먹이고 재웠다는 뜻이다. 미드는 이토록 눈부신 인류의 문명이 그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남을 돕는 사람들, ‘사려 깊고 헌신적인 소수의 시민’ 가운데서 생겨났다고 했다.

대퇴골 골절을 보살피는 일 정도라면 문명 시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6주 동안 꼼짝없이 갇혀 있는 인간에게 먹이만 준다고 잘 살았을까? ‘사려 깊고 헌신적인’ 이웃은 겁에 질렸을 그에게 틀림없이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주고, 그가 보고 겪을 수 없는 바깥세상의 일들을 이야기해주며 뼈가 붙은 다음에 할 수 있는 수많은 즐겁고 행복한 일들을 상상하게 했을 것이다. 말은 부러진 대퇴골을 붙여주지는 않으나, 부스러진 마음의 뼈대를 돌보는 힘이 있다.

3월 중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완화된 다음, 조심스럽게 대면 강의를 시작했다. 장소는 체인지업그라운드의 이벤트홀로 옮기고 수강 정원은 강의실을 반만 채우도록 제한했다. 그러자 오미크론이 창궐했다. 과연 신청자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정원은 순식간에 채워졌다. 그중에는 우리 학부생, 대학원생도 많았다. 물론 포스테키안에게는 수강료를 받지 않으나, 과제와 연구로 쉴 새 없이 바쁜 학생들이 저녁 시간에 학점과는 무관한 강의를 들으러 오겠다는 것 자체가 나는 기뻤고, 고마웠고 또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혹 어디선가 돌직구와 팩트 폭력을 맞고 부러진 마음의 뼈대를 힘겹게 부여잡은 채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김대식 △김경일 교수 △윤고은 △나태주 △김중혁 작가가 강의를 마쳤다. 두 시간이 강연과 질문으로 빈틈없이 채워졌고, 많은 분이 남아 줄을 서서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눴다. 지금 내 머리에 강연 내용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갱년기를 앞둔 중년 여성의 한계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메타버스의 미래, 행복의 부킹프라이스, 왕복 네 시간의 지하철 출퇴근이 모여 만든 세계의 지도, 여자에게 버림받은 뒤 본격 시인이 된 시골 학교 교장 선생님과 ‘1카페 1작가’를 실천하는 소설가의 정성스러운 말이 남았다. 어디선가 뼈를 맞으면, 그때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