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상자와 인류의 발전
문자 상자와 인류의 발전
  • 최원일 / GIST 기초교육학부 교수
  • 승인 2021.11.14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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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단어 형태 영역을 비롯한 언어 정보 처리와 관련된 뇌 영역(출처: Dehaene & Dehaene-Lambertz, 2016)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을 비롯한 언어 정보 처리와 관련된 뇌 영역(출처: Dehaene & Dehaene-Lambertz, 2016)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아니 수백 번 접하게 되는 글자들. 과연 그 글자들은 우리 뇌에서 어떻게 처리되는 것일까? 이 글을 통해 뇌에서 일어나는 문자 정보 처리의 비밀을 풀어보도록 하자. 
그것이 책이든, 웹페이지든, 논문이든, 심지어 자막이든 글자 정보에서 반사되는 빛 에너지는 망막에 있는 시신경 세포들을 깨운다. 이 정보는 시상(Thalamus)을 지나 후두엽(Occipital Lobe)의 1차 시각피질(Primary Visual Cortex)로 들어온다. 여기서 △방위 △명암 △길이 등에 민감한 단순 세포(Simple Cell)들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아직 이 단계에서는 글자 하나하나의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 1차 시각피질을 통과한 정보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좌반구 후두-측두 영역(Left Occipito-Temporal Area)에 위치한 시각 단어 형태 영역(Visual Word Form Area, VWFA)으로 들어간다. 이 영역에서 글자는 의미 있는 정보로 구성되고 문자언어 이해가 시작된다.
문자 상자라고도 불리는 이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이야말로 지금껏 이룩한 인류의 발전을 이끈 원동력 중 하나라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인류에게 처음부터 문자를 처리하는데 특화된 영역이 뇌 안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문자는 역사가 약 5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외부의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영역 일부가 문자 처리를 담당하도록 뇌 회로를 변경했다(Stanislas Dehaene은 이를 ‘신경 재활용’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이 변화를 통해 인류는 문자가 가지는 효용 가치를 분명하게 깨달았고, 누리고 있다. 문자의 발명 이전에는 지식이 고정돼 있지 않고, 현상의 근본 원리에 대한 이론적 지식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 후 문자의 발명을 통해 인류는 지식을 외부화(Externalization)할 수 있게 됐고, 기록을 통한 기억의 확장이 가능해졌다. 즉, 지식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이런 문자의 엄청난 이로움 때문에 인류는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뇌 영역의 일부를 문자 정보 처리에 특화되도록 허용했을 것이다.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까? 일단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전 시각 영역으로부터 들어온 낮은 수준의 형태에 관한 정보로부터 글자와 단어를 식별하는 기능을 한다. 영어를 통해 밝혀진 초기 연구 결과를 보면, 일반적인 단어에서 흔히 나타나는 두 글자 조합(Bigram)에 이 영역이 반응하며, 일반적인 규칙에 어긋나는 두 글자 조합이 제시될 경우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또한 이 영역은 단어에 대해서도 반응한다. 특히 흥미로운 결과는 더 자주 쓰이는 단어가 제시될수록 이 영역이 적게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주 쓰이는 단어일수록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의 뉴런들이 그것을 처리하는 데 더 적은 에너지를 사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은 단어의 소리와 의미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하측 전두엽(Inferior Frontal Lobe)이나 상측 측두엽(Superior Temporal Lobe)과 같은 다른 뇌 영역들과 기능적으로 연결돼 있다.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의 발달과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역이 문자 상자로써 기능하기 전에 문자언어 습득을 위한 해부학적 연결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5세 아동의 좌반구 후두-측두 영역의 구조적 신경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아동들의 시각 단어 형태 영역과 다른 뇌 영역의 연결 양상을 통해 향후 8세가 된 시점에서 단어를 처리할 때 활성화되는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우리의 뇌가 글을 읽는 것을 배우기 전에 먼저 해부학적으로 읽기 학습을 준비한다고 볼 수 있다. 읽기 학습이라는 기능적 발달이 뇌의 구조적 발달의 바탕 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흥미로운 연구 결과다.
그렇다면 이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이 손상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영역이 손상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심각한 읽기 장애가 나타난다. 이런 장애 중 대표적인 질환은 순수 실독증(Pure Alexia)인데, 말하기나 글쓰기 능력은 보존된 채로 문자로 된 단어를 전혀 읽지 못하거나, 읽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질환이다. 이 질환의 환자들은 사람의 얼굴이나 그림, 일반 사물 등을 인식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 유독 글자나 단어를 인식하는 능력만 손상된 경우다. 만약 아직 읽기를 배우지 못한 아동에게 동일 영역의 손상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이 아동은 글을 읽을 수 없게 될까? 다행스러운 점은 여전히 글 읽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아동의 경우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은 좌반구가 아닌 우반구에 나타난다. 연구에 따르면, 좌반구 절제로 인해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이 제거된 4세 아동의 경우 여전히 읽기 학습이 가능했고, 이 아동이 11세가 됐을 때 뇌 영상 연구를 실시한 결과, 다른 언어 정보 처리의 중추는 좌반구에 있었지만, 문자 정보 처리는 우반구의 시각 단어 형태 영역으로 이동돼 있었다. 즉, 우리 뇌는 잘 갖춰진 신경 회로가 준비돼 있긴 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 문제에 대처할 플랜 B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인류는 문자라는 발명품을 통해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왔다. 인간의 뇌가 문자 정보 처리를 위해 특화된 뇌 영역인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을 발달시킨 것만 봐도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시각 단어 형태 영역도 바쁘게 일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아직 글을 읽지 못하던 수십 년 전 당신의 시각 단어 형태 영역도 오늘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책 읽기 딱 좋은 계절이다. 아니, 시각 단어 형태 영역이 활동하기 딱 좋은 계절이라고 해야 할까? 내친김에 오늘 저녁엔 도서관에서 평소 읽고 싶었던 책 한 권 빌려 기숙사로 향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