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의 커피
내 곁의 커피
  • 윤건수 / 물리 부교수
  • 승인 2021.06.2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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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KTX 서울역에 도착해 지하철로 옮겨 타고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로 나와 논현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압구정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세월의 변화가 궁금해서인지 약속 장소인 카페 다이아만티노까지 걷는 동안 거리의 풍경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오전 산책을 즐기며 약속 시각보다 아주 일찍 도착했는데… 이런, 아직 오픈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바로 옆 스타벅스로 들어가 노트북을 펴놓고 일을 했다. 나는 두 해 전 딸아이의 과외 활동 때문에 몇 차례 포항시 양덕동의 카페를 이용하면서 카페에서 공부하는 맛을 알게 됐다. Caltech에서 유학하던 시절, 실험이 잘 안 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캠퍼스 중앙의 카페로 가면 종종 마주쳤던 선배가 있었다. 항상 날씨 좋은 곳의 어느 그늘에나 앉아 여유롭게 논문 읽는 모습이 아주 부러웠다. 그 정도로 멋진 곳은 아니지만, 노트북을 놓고 편하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 여기에 있어서 감사하다.
오전 미팅을 마치고 오후 일정을 위해 다시 카페 다이아만티노를 찾았다. 이 카페는 조금 특별한 곳이다. 우리나라 굴지의 다이아몬드 판매, 가공 기업인 주식회사 삼신이 만들어 운영하는 카페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미팅 장소인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다이아몬드 박물관과 조형물이 보인다. 지하 매장 한쪽 벽면의 다이아몬드 조형물을 보니 몇 해 전 탄화수소 플라즈마로 다이아몬드를 합성해보려다가 검댕(카본블랙)만 만들어진 기억이 떠올라서 좀 더 의미 있는 장소로 느껴졌다. 그런 연결성을 찾아서인지 오후 미팅을 위해 주문한 아메리카노의 맛이 친근하다. 미팅에서 인간의 지능을 결정형 지능과 유동형 지능으로 나눌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나누고자 했는데, 마침 다이아몬드 조형물이 그곳에 있어 이야기하는 데 적절한 도움이 됐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포항으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에 여유가 있어 서울역으로 바로 가지 않고 가까운 청파동으로 향했다. 사실 이 여유는 저녁 시간대에 포항으로 가는 기차가 없기 때문에 다소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에게는 맛집을 찾을 좋은 기회다. 특히나 전날 대전 출장에서 가히 충격적인 맛의 저녁 식사를 했던 터라 이번에는 검증된 식사 장소가 필요했다. 청파동 중림장설렁탕에는 연세 많으신 분들로 가득했다. 언젠가 이분들도 떠나시면 이곳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더해 특설렁탕을 맛있게 비우고 몸의 에너지를 충전했다. 저녁 식사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남아서, 서울역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청파로를 따라 천천히 걷기로 했다. 그날따라 날씨가 쾌청해서인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약현성당,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라는 안내판을 맞이하고 언덕길을 오르니 아담하고 평온한 벽돌식 교회 건물과 정원이 나타난다. 발그스레한 벽돌 색감에 젖어 한참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약현성당을 뒤로하고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는 우연히 반가운 우리대학 교수님 한 분을 만났다. 기차 시간이 애매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누리는 여유로 그날 하루를 충만하게 했다.
아침저녁으로 대학 캠퍼스를 걸어서 출퇴근하는 것은 내가 가장 감사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약간의 다양성을 위해 몇 개의 루트를 만들어 놓았지만 사실 뻔할 수밖에 없는 동선이다. 그러나 날마다 다른 날씨, 산책하는 사람들과 길고양이들을 배경으로 사색하며 걸을 수 있어 지루하지 않다. 이에 더해 얼마 전 학생회관 1층에 있는 카페 커미(coffee nearme) 옆에 야외 공간이 새로 탄생해 일상이 더욱더 즐겁게 됐다. 일 년에 한두 번 실험실이나 학과 행사로 고기를 굽던 장소였는데, 이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야외에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됐다. 나에게는 일상에서 개인적인 여유를 갖고 일, 연구와 신변잡기를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감사한 곳이 됐다. 채광을 위해 설치한 반투명 지붕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광학 효과, 카페의 접이문을 열면 나타나는 공기 유체 현상 등 재밌는 자연 현상도 체험할 수 있다. 앞으로 많은 학생이 카페 커미를 곁에 두고 일상의 여유를 찾아 휴식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생들도, 그들의 우수한 ‘유동화’ 지능이 잠들지 않도록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