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크레파스
파란색 크레파스
  • 이신범 기자
  • 승인 2019.04.24 1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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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 스케치북과 낡아빠진 크레파스 통을 가지고, 매번 똑같은 그림을 그린다. 끝이 눌려 뭉뚝해진 빨간 크레파스로는 한쪽 구석에 동그란 태양을 불어 넣는다. 은은한 주홍빛을 띠는 불가사리는 노란 모래를 점 찍어둔 백사장에 살고 있고, 바닷속에는 초록 크레파스로 이름도 모를 해초를 담는다. 남색 티셔츠를 입은 채 얼굴도 표정도 똑같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소년의 손에는, 보라색의 조개가 들려있다.
어릴 적 그렸던 그림들은 항상 비슷했다. 해안가 끄트머리에는 회색빛의 방파제 위에 빨간 줄무늬를 가진 등대가 서 있고, 끝이 날카로운 검은색 크레파스로는 짱구 눈썹 같은 갈매기를 그렸다. 네모나고 헤진 플라스틱 크레파스 통 안의 여러 가지 것들로 항상 일정한 무엇인가를 뱉어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것은 짧고 뭉툭한 크레파스가 됐고, 또 어떤 것은 새것처럼 길고 날카로운 크레파스 그대로 남았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그리고 초록색. 많고 많은 크레파스 중 항상 가장 먼저 닳았던 것은, 파란색 크레파스였다. 날카로운 크레파스 끝이 조금씩 무뎌질 때면, 그것을 덮고 있는 종이 쪼가리를 떼어내고 손에 크레파스를 묻혀가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파란색으로는 항상 스케치북의 절반을 채울 만큼 커다란 하늘을 그렸고, 이따금 물고기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푸른 바다를 채워 넣기도 했다.
파란색 크레파스로 하얀 도화지에 선을 그려 넣고, 그것들이 하나의 그림이 돼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파란 크레파스로 일련의 그림을 불어넣는 과정은 또한 소중히 여겼던 파란색 크레파스를 닳아 없어지게 하는 일이었다. 위를 꽉 메운 드넓은 하늘 하나. 좋아하는 푸른 바다 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크레파스는 살점을 뱉어냈다. 그렇게, 스케치북에 그림을 다 채워 넣기도 전에 파란 크레파스는 곧 닳아 없어졌다.
쓰임으로써 닳아 없어지는 것들. 하지만 사용될 때 비로소 가치가 드러나는 것들이 있음을 나는 조금은 일찍 알았다. 사용될수록 날이 서고 빛이 나는 것들. 그것과 반대로 사용될수록 헤지고 빛이 사그라드는 것들. 자신의 살점을 깎아가며 도화지 위에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한겨울 좁디좁은 난로 안에서 까맣게 숯이 될 때까지 타버리는 연탄은 어떤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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