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의 의미와 그 후-남북정상회담 이후의 변화]
[남북 정상회담의 의미와 그 후-남북정상회담 이후의 변화]
  • 최석우 / 노동일보 기자
  • 승인 2000.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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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로 가는 길’ 급진전은 기대하기 힘들 듯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배경은 전반적인 정황을 종합해볼 때, 남측의 이니시어티브로 이루어졌다는 게 정설인 것 같다. 정부에서는 이를 두고 ‘선샤인폴리시’, 즉 햇볕정책의 결과라고 자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밀어붙이는 따위의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과연 무슨 말을 나누게 될까. 그리고 어떤 합의를 끌어낼까. 전문가들은 만남 자체에 의미가 있는 만큼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기는 힘들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특히 종전협상의 당사자가 남과 북이 아닌 북과 미국이라는 점에서 불가침협정이나 평화협정은 아직 기대하기 이르다. 여기에는 그동안 북측이 끊임없이 주장해 왔던 미군철수라든가 국가보안법 철폐와 같은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남측이 준비접촉에서 제기한 의제는 남북경제협력 확대, 이산가족 문제해결, 한반도 평화정착, 남북당국간 대화정상화 등 네가지였지만, 이에 대해 북측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이른바 조국통일 3대원칙으로 응수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주는 미군철수를, 민족대단결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각각 의미한다. 결국 남과 북의 두 정상은 이번 만남에서 상징적이고 원칙적인 차원의 ‘평화선언’을 발표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접근방법에 대한 남과 북의 이같은 차이는 ‘공존’에 대한 자신감의 유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관념적 수사들과는 달리 현재 북한은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게 사실이다. 식량, 전력, 의류, 의약품 등 기초적인 물자의 부족 상태는 더 이상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달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자력갱생의 구호는 자존심만 선물했을 뿐이다. 이 모든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북의 지도층은 수십년간 빗장을 걸어잠그고 ‘자폐’의 증상을 보여 온 북의 문이 열릴 때 발생할 ‘어떤 일’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식량난만을 놓고 본다면 북한은 현재 국가라고 불리우기조차 힘들지만, 당, 군 그리고 인민무력부로 대표되는 북한의 국가기구는 아직도 견고한 것 같다. 여기에 북한은 루마니아와는 달리 주체사상이라는 그들만의 사유체계가 있다. 이 때문에 르몽드 같은 신문은 “북한정권이 안으로부터 붕괴되지 않는 한 현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남측 역시 공존을 독자적으로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우선 남측에는 과거 서독이 통일을 위해 지불해야 했던 기회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물론 이 기회비용은 전적으로 남측이 책임져야 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어차피 분단이 민족의 뜻과 무관한 것이었던 만큼 원상회복에 드는 비용 역시 ‘세계’가 함께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측으로서는 속도조절을 할 수밖에 없는 셈인데, 이 속도조절의 주체가 아직까지는 남한이 아니라는 데 비극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외신들은 한반도 주변의 강국들이 남북한 통일을 바라지 않고 있다고 타전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남북한 통일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현상유지가 그들의 속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통일이 될 경우 북한의 위협을 내세우며 이 지역에서 유지해 온 군사력의 정당성이 없어지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일본 역시 하나의 한국보다는 두 개의 한국을 훨씬 더 선호하고 있다.

한편,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매력적인 투자대상인 것은 틀림없으나 검증되지 않은 시장이다. 정상회담의 후속조치로 남북간 경제협력이 증대되면 그 자체로서 화해의 증표가 되겠지만, 북한의 현재 사회간접자본 상황을 감안할 때 경제적 장애가 적지 않다. 이와 관련,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 등 자신의 필요성 때문에 협상 테이블로 나오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남북 두 정상은 ‘평화선언’의 기본틀에 일단 합의한 뒤 경제협력, 이산가족 문제 해결 등을 위한 별도의 실무접촉틀을 만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합의서에 경제공동위원회 설치 및 가동을 명문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또한 이산가족 문제와 관련, 최근 양영식 통일부 차관이 이산가족 문제와 경제협력을 연계시키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바 있으나 실제 협상과정에서 남측이 이를 패키지로 처리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50년만의 역사적인 만남인 만큼 가시적인 성과물이 전혀 없을 경우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화두는 ‘공존’이다. 현 단계에서 공존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커다란 요소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북한의 불확실성이다. 북한이 문을 열고 무사히 연착륙에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야말로 통일 실현의 가늠자다. 화해와 협력은 공존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